나 이제 외로움을 알 것 같아
"외로움을 느끼는 네가 부러워"라고 말한 친구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당시까지만 해도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어 감정이 풍부해 외로움에 시달리는 나를 오히려 부러워했었고, 그 말은 곧 나에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그 친구가 "나 이제 외로움을 알 것 같아" 라며 소식을 전해왔다. 놀란 맘에 "네가 왜?"라고 되물었는데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었다.
사실 친구에게는 최근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건강 이상이 생겨 7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녀의 그러한 결정에 나와 다른 친구들은 정말 애썼다며 박수를 보냈으며, 친구 역시 그 결정에는 후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수인계까지 모두 마치고 친구를 찾는 고객들의 전화나 창고 안 물건의 위치 등 쓰잘데기 없는 것까지 전화해서 묻던 직원들의 전화도 뜸해질 때쯤 친구에게는 무료함이 찾아왔다.
오랜 시간 숨 가쁘게 살아왔기에 잠깐 동안의 무료함은 오히려 힐링이었다.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약속도 자유롭게 잡으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몇 개월이 흐를 때쯤 무료함은 쓸쓸함으로 퇴색되어 갔고 자유의 시간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고독의 시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고 싶었는데 막상 쉬고 나니 뭐라도 하고 싶어 지는 아이러니함을 직격타로 맞아버린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매일 같이 수많은 고객들과 대화하고 동료들과 왁자지껄 하루를 함께 보냈는데 어느새 하루 종일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거울 속 자신과 가족들, 이따금씩 소수의 친구들이 전부였다.
그러던 와중 전 직장 동료들과의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흔한 자리였을 텐데도 퇴사 후 이런 자리를 가지니 유난히 반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는 오래전에 썸을 탔던 남직원도 껴있었다. 두 사람은 이어지지 않을 이유가 있어 이어지지 않았고 친구는 지금도 그 사람과 만날 생각이 추호도 없는 상태였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두 사람은 집 방향이 비슷한 탓에 어찌어찌 함께 택시를 타게 되었다. 어색한 택시 안의 공기, 술에 취해 알딸딸한 정신머리에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려야지 하며 눈을 부릅뜨고 있을 무렵, 남직원이 덥석 손을 잡았다.
평소였다면 친구는 가차 없이 손을 뿌리쳤을 것이다. 더 이상 썸을 타는 관계도 아니었고 올곧은 그녀의 성격상 그 손은 잡지 않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그날따라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손에 살포시 엎어진 타인의 손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이다. 맞닿은 손의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속 갈라진 틈새를 파고들어 그녀의 체내 온도를 1도쯤 올려주었고 머릿속에 '대체 이 감정은 뭐지?'라는 물음표를 만들었다.
이후 당연하게도 그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깨닫고 보니 그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야 나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전화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러한 친구의 고백에 외로움을 겪었으니 위로를 해줘야 할지, 드디어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축하한다고 전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결국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뭔가 이상하다"라는 솔직한 감상만을 전하게 됐다.
불현듯 그녀가 그동안 외로움을 몰랐던 건 일을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7년간 일과 열렬한 사랑을 나눴고 이별을 겪고 나서야 빈자리의 허전함과 상실감, 외로움까지 한 번에 찾아와 마음이 혼란해진 것이다.
외로움이란 감기와도 같아서 쉽게, 그리고 자주 찾아오지만 완치를 위한 약은 없다. 면역을 위한 항생제도, 단계 완화를 위한 양약도 각각의 체질에 맞게 챙겨 먹어야 하므로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식의 추천은 불필요하다. 나름 먼저 외로움을 투병한 환자 선배로써 크게 도움이 될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언제든 소주 한잔 하자고 부르면 달려 나갈 자신만큼은 있으니 용서해주길 바란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외로움을 알게 되면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외로움은 아프지만 성장의 계기가 되고 감정의 스펙트럼은 넓을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지지 않겠는가. 한번 외로움에 시달려보는 것도 삶의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어서 와라 친구야. 웰컴 투 외로움 월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