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난 결국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소심한 성격은 기본이고 인내심이 바닥인 데다가 잡생각이 너무 많은 나의 인생은 들여다보면 포기의 역사가 길게 이어진다. 분명 처음에는 A로 할지 B로 할지 정도의 고민이었는데 갑자기 C라는 선택지를 골라버린 풀이과정조차 불분명한 답안지 같은 삶.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나는 원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고 싶어 졌고 잡지사 에디터라는 꿈을 꾸게 된다. 이런저런 노력을 대충 하다가 문득 좁은 잡지사 취업문에 자신감을 잃고 난데없이 블로그를 하게 된다. 어찌 됐든 글을 쓰긴 하니까 글쟁이 언저리에는 다가간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어릴 적 내 꿈의 목록에는 바이럴 마케팅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원래의 꿈을 위해 노력할지 아니면 꾸준히 돈을 받으면서 원래의 꿈은 취미로 남겨둘지 생각하다 오늘도 생각을 포기한다.
어느 날은 예쁜 옷이 사고 싶어졌다. 예쁜 옷이 무얼까 옷집들을 둘러보다가 불현듯 메이커가 달린 옷이 눈에 띈다. 기왕 살 거 조금 비싸도 오래 입을 옷을 살까 고민한다. 어느 순간 내 손에 들린 것은 둥근 코가 매력적인 메리제인 구두였다. 이상하다 맨 처음 생각 속에 구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무난한 디자인에 어느 옷에나 매치하기 좋아 보이지만 그래, 난 이 구두에 어울리는 옷이 없다고 옷이.
나의 어린 시절은 생각보다 가난했다. 나는 그냥 오빠랑 싸우지 말라고 아이스크림을 반 씩 나누어서 준 줄 알았는데 그게 간식을 풍족하게 사줄 돈이 없어서 그런 거였단다. 내가 번데기를 잘 먹어서 번데기만 사준 줄 알았는데 포장마차 메뉴 중 그게 제일 저렴해서 사준 것이었단다. 메이커가 없는 교복을 사준 게 시골에서 자란 엄마가 센스가 없어 그런 줄 알았는데 메이커 교복이 생각보다 가격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된다는 말보다 안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살았다. 10여 년 배운 피아노도 부모님에게는 돈 먹는 괴물에 불과했고 불과 중학생이던 나이에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피아노를 기깔나게 치는 재주 따윈 없었고 피나도록 노력하는 성실한 인재도 아녔으니 딱히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흘러갔다. '그래 해보자' 보다는 '그래 모르는 건 하지 말자.'라는 말이 익숙한 인생으로.
그러다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화가 났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 가지지 못했던 물건들. 왜 내가 충분히 할 수 있고 살 수 있는 것들도 겁내고 살아야 하는 지 마음속에 꽁꽁 숨겨놨던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그냥 친구들처럼만 해보고 싶었다. 메이커가 달린 옷을 사고 친구들과 해외여행도 즐겨보고 이유 없이 귀여운 물건도 사보고 싶었다. 앞으로는 겁내지 말고 운전도 하고 새로운 것도 배우고 안 해본 것, 잘 모르는 것 구분 없이 모조리 다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일탈이 짜릿한 이유는 하나다. 평소보다 재밌으니까. 돈은 소비할 때 행복하고 모든 배움은 시작할 때 가장 흥미롭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할까', '하지 말까'하는 상황에서 늘 '할까'를 선택했다. 항상 안 된다는 말을 들어온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렇게 재미만 보고 달린 뜬 구름 같은 시간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뭐든 해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막상 해보니 별로거나 실패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마음의 힘이 길러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허세로 가득한 겉모습과 달리 몽글한 심장을 가졌던 나는 무언가 잘 안되었을 때 머릿속에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했지', '넌 대체 왜 이렇게 사고만 치니' 같은 말들과 실망한 사람들의 표정이 밤새 떠올랐다. 그냥 하기만 하면 남들처럼 다 되는 건 줄 알았는데 해보니 쉬운 일은 하나도 없고 내가 잘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다들 날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지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그래, 난 결국 이 정도의 인간이니까. 이렇게 된 게 당연해.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는 건데 굳이 일을 벌여서 늘 크게 만들지. 나는 평균 이하의 인간인데 그동안 착각하고 살았던 거야.
스스로 자신을 찌르고 상처를 내면서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아,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걸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나는 유리 지붕에 둘러싸인 메뚜기다. 내가 뛸 수 있는 높이가 정해져 있는데 굳이 더 뛰려고 노력하니 유혈사태만 불러일으키지.
어느덧 내 나이는 30대에 진입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텅 빈 통장과 그것보다 텅 비어버린 마음뿐이었다. 아직 사춘기 청소년만큼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그나마 오른손에는 흑염룡 정도 살고 있으려나. 나의 인생이 남들이 말하는 실패한 인생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의심한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살고 있다. 아예 무너져버리는 건 그것 나름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이다.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은 내야 하고 벌려놓은 사업은 책임져야 하고 쓰던 글은 마저 써야 하니까.
내가 어릴 적 가장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 중 하나가 불우한 어린 시절을 한탄하거나 부모를 원망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서 우리 같은 이쁜 자식들을 두었는데 왜 술을 마실 때마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지 정말이지 꼴 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은 이 순간 가장 적합한 예문이겠지. 그 모습이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어떤 해결책을 바랐던 걸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이제와 그립다고 그 시절을 미화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건 그때의 아버지도 나도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근데 나는 무슨 말이 듣고 싶냐면, 그냥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다. 실패하면 좀 어때, 막상 해보니 별로이면 좀 어때, 원래 한 가지만 잘하기도 어려운 세상이야. 너 글 쓰는 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10년 후에 통장이 텅텅 빈 것보다는 지금 비어서 채워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 또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걱정 마 너 똑똑하고 예쁘고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야 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나에게 말을 해준 꼴이 되어서 이상하지만 오히려 좋다. 누군가에게 들을 수 없다면 스스로에게 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괜찮다 괜찮아.
내가 글을 너무 오래 안 쓰면 브런치에서 메시지가 온다.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라는 독촉 메시지. 나는 볼 때마다 재능보다는 꾸준함에 시선이 간다. 내가 재능이 있을 까 보다는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더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지박약 또한 열등감에서 파생된 생각 중 하나이다. 내가 잘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브런치가 보낸 메시지에서 단어만 하나 바꾸어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작가님의 열등감은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라고.
사실 열등감은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누구보다 뛰어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화가 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놓아버리지만 않는다면 나의 열등감은 어느 때고 재능으로 변할 수 있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이다. 당장 7시에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하는데 글을 쓴다. 오늘도 이 글을 발행 버튼이 아닌 저장버튼을 눌러 봉인한다면 누구보다도 못한 인간이라고 주문을 걸어놨기 때문이다. 나의 열등감이 이렇게 꾸준함이라는 재능으로 피어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