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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제로 Oct 30. 2022

기억력이 너무 좋기 때문이야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과 청명한 하늘을 볼 때 내 기분은 좋다가도 우울해진다. 좋은 날씨에 기분이 좋지만 이런 좋은 날에 있었던 어느 순간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글라이더 대회에 나가서 직접 만든 글라이더를 던졌던 기억, 대학교 신입생 시절 푸른 가로수 사이를 신나게 달려갔던 기억, 해바라기 축제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기억 등 행복했던 날들이 몽실몽실 구름처럼 내 머리맡에 머무른다.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해지는 까닭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지루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시간과 그때의 설레는 기분으로 가득했던 시간을 비교하면 오늘이 참 보잘것없이 느껴져서 슬퍼진다. 



가끔 내가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기억력이 너무 좋기 때문이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지나온 일들은 금방 잊고 앞으로의 날들을 생각하며 지내기에 나는 기억력이 너무 좋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어단어들을 전부 외울 수 있는 능력자였으면 좀 더 큰 사람이 되었겠지만 나는 주로 내가 겪었던 상황 위주로만 기억력이 좋다.


이 넓은 우주에는 내가 생각지 못한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떤 일들은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만든다. 유난히도 삶의 진동이 컸던 날은 다른 날에 비해 잔상이 길게, 또 오래 남는다. 켜켜이 쌓인 추억들은 머릿속에 책갈피가 꽂아지고 두고두고 페이지가 펼쳐진다. 


유난히 추운 날. 유난히 아스팔트 바닥이 딱딱하게 느껴지는 날. 몽글몽글 떠오르는 추억들은 혼자서 걸어가는 길을 아주 잠시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성냥불이 된다. 하지만 잠시 타오른 불빛은 금방 차갑게 식고 이후의 시간을 더욱 춥게 만든다. 더욱 인생은 혼자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이럴 때는 나의 기억력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살기에 세상은 그리 푹신한 곳이 아니라서 이런 말들이 생겨난 것 같다. 어서 빨리 잊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라고 우리는 잠을 자고 과거의 기억들을 조금씩 잃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외로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짧게 느끼는 사람과 길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길게 느끼는 사람은 외로움에 잠식당하고 외로움이라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외로움 투병환자로써의 시간을 아주 길게 보냈다. 


그 사이 나는 일을 늘렸고, 모임을 시작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정을 계속 망각하기 위해 자꾸만 샛길로 쉬지 않고 걸어갔다.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는 외로움을 외면하고 앞만 보며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저만큼씩 걸어가 있었다. 어쨌든 인생이 굴러갔다. 


브런치에 올리는 투병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진짜 내 투병일기는 아마 계속 이어질 것이다. 외로움을 외면하기 힘든 날도, 숨이 막힐 만큼 속상한 날도 분명히 나를 찾아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계속 인생을 굴려나갈 생각이다. 샛길이든 숲 속이든 종착점은 반드시 있으니까. 



외로운 사람들의 하트를 받으니 덜 외로워졌다. 이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덜 외로워지기를 바래보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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