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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제로 Aug 13. 2021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의 안락함 (1)

우리여행 갈래?

그래 좋아!

내가 넌지시 건넨 '여행 가자'라는 말에 동생은 숙소가 맘에 들어서 좋다고 했다. 이어서 엄마는 기왕 갈 거면 1박 2일보다는 2박 3일이 좋다고 했고 오빠는 무슨 이유에선지 숙소 예약을 본인 카드로 하자고 했다. (오예)


이거이거 우리 가족들 여행 가자고 꼬시는 게 생각보다 쉽잖아? 까일 것까지 예상하고 던져본 말인데 어느새 2박 3일 강원도 양양 여행 일정이 달력에 적히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사천리였다.




나는 역마살이라도 낀 사람처럼 여행을 좋아한다. 빡센 관광도 좋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예쁘고 아늑한 숙소에서의 여유로운 한 때인 것 같다.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굳이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방 안에서 힐링을 느낄 수 있는 스파 욕조가 있는 오션뷰 펜션이 취향이다. 사실 오션뷰 풀빌라가 내 집이라면 여행이고 뭐고 집순이가 되었을 것 같다. 아님 그때는 마운틴뷰 펜션을 좋아하게 되려나. 여하튼.


최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내 취향에 맞는 기가 막힌 펜션을 하나 찾아냈는데 막상 같이 가자고 할 사람이 없어 괜스레 속상한 상태였다. 지금은 남자 친구도 없고 한가한 친구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저 나중을 기약하며 나와의 채팅창에 펜션 링크를 하나 남겨두고 아쉬움의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역시 못 가겠지'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이지 이곳은 특별했다. 오션뷰는 아니었지만 무려 숙박 손님들만 이용할 수 있는 맑은 계곡이 앞에 흐르는 계곡 뷰였고, 넓은 객실 안에는 커다란 온천 같은 욕조가 구비되어있었으며, 바베큐장이 방 한켠에 고깃집처럼 제대로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을 채운 통유리창에서는 계곡과 숲이 울창한 자연경관이 보였다. 여긴 꼭 가야 하는 곳인 것이다.(사장님께 돈 받은 거 아님)


왜 하필 가고 싶은 펜션이 있을 때 남자 친구도 없는지,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왔길래 친구도 별로 없는 건지 이번에도 지난번 호텔처럼 나 홀로 여행이라도 떠나야 하는 건지. 당최 제대로 된 아이디어 생성 조차 못하는 전두엽을 원망하며 애꿎은 이마만 탁탁 쳐댔다. 


잠시 후 갑자기 불똥이 떨어진 전두엽은 상황을 파악하더니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너에게 남은 인맥은 가족밖에 없음. 한번 같이 가자고 물어나보렴'


가족! 새삼스럽게 새삼스럽지만 나에겐 가족들이 있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나름 가족여행을 꾸준히 가는 집안으로, 여름휴가나 황금연휴에는 꼭 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여건이 안되면 시골에 있는 외갓집이라도 들르곤 했다. 여행 가자는 나의 말을 달갑게 받아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내가 먼저 여행을 가자고 했던 경우는 없었기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 간다고 해도 걱정이고 안 간다고 해도 맘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막상 다들 간다고 하면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네가 가자고 했잖아'라고 원망하거나 '우린 그저 가주기만 할 테니 모든 계획은 네가 짜렴'이라고 한다던가 '막상 와서 보니 별로네 괜히 왔어'라는 말로 나를 기죽게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나같이 다들 거절하는 건 너무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나는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 하는 성미였으므로 미끼를 던졌고 가족들은 기꺼이 미끼를 물어주었다. 




처음으로 나의 제안에 떠난 가족여행. 걱정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족들은 찌질하고 투덜이인 나와는 달리 관대하고 배려심 있는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괜히 왔다는 둥 별로라는 둥 네가 가자고 했다는 둥 그런 옹졸하고 나쁜 말은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계획은 전부 내가 짜야했다. MBTI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계획이 없는 여행은 견디기 힘든, 끝자리가 'J'인 사람은 나뿐이었고 다들 '당일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끝자리가 'P'인 즉흥여행파였기에 종국에는 어느새 나 혼자 맛집이며 볼거리며 숙소 정보 등을 찾느라 바빴다. 


오빠는 그런 나를 보며 '원래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며 놀려댔는데, 실제로 내가 알아본 맛집이 폐업했다던가 휴무라던가 하는 일이 계속되면서 오빠가 나를 놀린 게 아니라 저주를 내린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며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숙소들만은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가족들도 꽤나 만족해하며 이런 곳이 있었느냐고 다음에도 와야겠다고 감탄했다. 솔직히 이렇게 다들 좋아해 줄지는 몰랐는데 반응이 좋으니 괜스레 어깨가 넓어지며 코가 오똑해졌다. 


어찌 됐든 여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고 싶은 곳에 오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렀다. 외롭지 않게, 따뜻하게, 돈도 혼자 독박 쓰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누렸다. 가족들에게는 크게 잘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통통 튀는 즐거움은 없었다. 인스타에 올릴만한 인생 샷도 그다지 건지지 못했다. 그래도 안락했다. 


분명 내가 있는 곳은 집에서 한참 떨어진 강원도 어딘가였는데 집에 있는 듯했다. 집이 꼭 공간을 의미하는 건 아닌 듯하다.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가 주는 안락함은 참으로 대체 불가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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