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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썬제로 Jun 01. 2022

너를 불안하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여기 피리 부는 한 사람이 있다. 피리 소리는 얇고 불규칙했지만 달콤한 선율로 고막을 울렸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한 여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소리에 이끌려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피리 부는 사람의 뒤를 종종 쫓아가던 어느 날, 피리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입 끝에서 나는 작은 숨결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소리야'


그리고 그는 여자를 두고 떠나버렸다. 여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의 피리소리에는 제대로 된 복식호흡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걸. 미련인지 후회인지 모를 망설임이 여자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여자는 뒤돌아섰다. 처음 서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나 그를 따라 걸었던지 주변의 풍경은 낯설었고, 여자는 방황을 시작했다. 



최근 몇몇 인연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 인연은 무게도 없이 선선한 바람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어떤 인연은 가랑비처럼 어느새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는 첫 만남부터 내게 호감을 표시하며 다가왔다. 눈빛은 반짝였고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좋은 페로몬을 풍기고 있었다. 


경계하려고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다.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고 분위기에 취해 실없는 웃음을 자꾸만 짓게 된다. 그래도 뭐 어떤가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고 나도 지금 이 순간이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우리는 호감을 가진 상태로 몇 번인가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자꾸만 불안해져 갔다. 내 안에 좋아하는 마음이 싹이 트고 자라날수록 수분이 부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쯤 과연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점 느려지는 답장 속도와 내가 좋냐는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던 모습, 늘어가는 거짓말, 정확히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확신을 주지 않는 대답.  


처음에는 내가 애정결핍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들보다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 날카로운 게 아닐까 하며 반추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좀 더 어렸을 때였다면 그의 마음을 진짜로 얻기 위해 한 수 접고 내려가 노력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아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는 쪽을 택했고, 쉽게 다가왔던 그 사람은 어느 날 참 쉽게 내 곁을 떠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마음이 후한 편이었다. 몇 번 보지도 못한 그 사람에게 내어줬던 빈자리가 생각보다 넓어 쉽게 메꿔지지 않았고 공허한 통증을 느꼈다. 


한참을 끙끙 앓던 나는 15살 때부터 친구로 지낸 A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문제로 A에게 힘들다는 말을 전한 것은 친구가 된 이래 처음이었지만 그 날 만큼은 그 친구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위로받고 싶은 날이었다. 


친구는 내 얘기를 한참 듣더니 왜 어려서 해야 할 고민을 지금 하고 있냐며 시원하게 웃어버렸다. 자신도 몇 년 전에는 그랬던 경험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징징거리는 나에게 '너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사랑이 아니야.'라는 말을 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나에게 안정감과 평안함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지금 네가 만난 그 사람은 너에게 호감 정도야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며 진짜 너를 사랑한다면 분명 확신을 주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소중한 내 친구가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게 화가 난다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니 남자에게 받은 상처는 고작 생채기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나를 다치게 하고 있던 건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나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다면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다가오는지 이미 선구안으로 걸러내고 냉정하게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눈빛 한 번에 마음을 한 움큼씩 줘놓고서는 주지 않은 척 상대방을 밀어내고, 또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사람을 보며 다시 상처받기를 반복했다. 이건 정말 바보 같은 루틴이었다. 쉽게 마음을 열어버리는 나보다 나를 가볍게 여기고 다가온 사람 때문에 아파한 내가 더 바보 같았다. 




나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내 앞에서 피리를 불지 않는다. 그러니 피리소리가 사랑의 세레나데인지, 그저 신나는 유행가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혹여 그 유혹적인 소리에 이끌려 따라갔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입에 피리를 물지 않은,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안정감과 평안함이 가득한 '나의 자리'는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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