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려 보이는 상추도 자세히 보면 강하다
나의 MBTI는 ENFJ이다.
두어 번 검사 결과 지속적으로 그걸로 나왔으니 인정하며 지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검사에 대해 왈가왈부 얘기하곤 한다.
무엇이든 본인 성격과 100% 딱 맞아떨어질 순 없으니 대략 50~60% 언저리만 된다면
일부 동의가 되든 아니던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인다.
ENFJ는 따뜻하고 적극적이며 책임감이 강하고 사교성이 풍부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상당히 이타적이고 민첩하며 인화를 중요시하며 참을성이 많으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견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추구하며 편안하고 능란하게 계획을 제시하고 집단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힘든 일 있을 때 다크 초콜릿 하나에 자그마한 통에 담아 무심하게 전해준 으깬 감자샐러드에 그리고 곤약쫀드기에 위로받는다.
건강을 염려하며 주는 아이들의 편지에,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건네는 학부모의 따스함에 가슴 뭉클해한다. 근사한 감사패보다, 한아름 꽃다발보다, 내 돈 주고 안 살 것 같은 비싼 기초화장품 5종세트보다.
이런 성향이다 보니 어린이집에 민원이 발생하거나, 복잡한 서류 업무가 있는 날이면 겉으론 아무 일도 아닌 것같이 행동하지만 내면은 널을 뛴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부는 날 한 뼘쯤 열어둔 창문에서 미친 듯이 너풀거리며 딱딱딱딱 소리 내는 하얀색 블라인드처럼.
이럴 때 나는 텃밭으로 간다.
처음 농작물을 키울 땐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그저 상추 정도만 잘 심어 수확하면 됐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점점 확장되어 지금은 상추,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 마늘, 양파도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은 그들이 나를 키운다는 생각을 한다.
상추가 주는 기쁨
상추는 4월 말이나 5월 초에 심으면 된다. 씨를 뿌리기도 하는데 나와 같은 초보자는 모종가게에 가서 상추모종을 사서 촘촘히 심는다. 상추는 아무리 자라도 다른 작물에 비해 몸집이 그리 커지지 않으므로 15cm~20Cm 간격으로 심어도 별 문제없다. 그러니 모종 한판(70개)을 심는데 그리 많은 공간이 필요치 않다.
작년 겨울의 일이다.
봄에 심은 상추를 수확한 후, 10월 중 상추를 한 번 더 심었다. 늦은 가을에 심어서 인지 봄처럼 쑥쑥 자라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예쁜 색을 내고 있었다.
기온이 조금 내려가는 날은 하얀색 부직포 천이나 현수막(행사하고 남은 천)을 덮어 두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대설이 내렸다. '아이고 늦게 심은 상추는 이제 다 죽었구나' 하고 마음 한편이 아렸다.
그리고 상추는 내게 그렇게 잊혀지고 있었다.
1월, 겨울이 한창이던 날, 기억 속에 사라져 간 상추가 번뜩 생각났다. 겨울 답지 않게 푹하던 어느 날이었다. 하얀색 부직포 천을 살포시 걷어봤다.
어머나 상추가 예쁜 버건디 색을 띠고 활짝 웃고 있네?
그 여리고 여린 상추도 그 추운 눈보라에 바람에 끄떡 앉고 작은 부직포천 하나 의지하며 저리도 굳건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구나... 나의 이 어려움도 추위를 막아줄 얇은 부직포천 만 있다면 괜찮아!
이게 바로 상추다. 여리다고 작다고 놀릴 일이 아니다. 귀하고 귀하다.
상추는 여러 가지 요리가 가능하다.
첫 수확을 하면 아이들과 삼겹살 파티를 한다.
고기가 있으니 상추를 곁들여 먹는 것이 아니라 상추를 수확하니, 삼겹살은 상추를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부재료에 불과하게 된다.
아이들과 상추 [키토김밥]을 만들어 본다.
재료: 상추. 달걀. 소금. 식용유. 김. 깨 약간, 밥 또는 단무지(약간/ 취향껏)
상추를 수확한다.
상추를 물에 살살 흔들어 씻는다.(아이와 함께! 납작한 볼에서 살살 씻도록 한다.)
달걀물을 만든다.
달걀물에 소금을 넣고 젓는다.(어른들을 위한다면 계란물에 약간의 MSG로 감칠맛^^)
상추를 찢어 달걀물에 넣도록 한다.(키포인트!! 아이와 함께! 삐뚤빼뚤 못나게 찢거나 대충 찢어도 괜찮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달걀물+상추를 두툼히 깔고 부친다.(상추가 이렇게 많아도 되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부치면 숨이 퐉 줄어든다.)
김 한 장을 깔고 다 익은 상추 전을 올린 후 김밥처럼 만다.(막 부친 상추 전은 뜨거우니 조금 식힌 후 말아본다.)
아이의 취향 따라 약간의 밥을 넣거나 상추 몇 장을 넣고 함께 말아도 좋다.
원장님! 이따 점심때 우리가 딴 상추로 만든 김밥 더 줄 수 있어요?
오늘도 완판 예정이다^^
매주 일정한 날을 정하여 아이들과 이렇게 요리로 놀이한다.
놀면서 맛있는 것도 먹는 일석이조
물론 준비해야 할 것도 치워야 할 일들도 많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것이 어찌 보면 세상의 이치 아닐까?
나는 이 번잡함과 바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느낀 것에 후회가 없다.
그들은 나를 위로하는 상추와도 같기 때문이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텃밭을 나가보니 가지가 아주 야무지게 대롱대롱 달려있다. 다음 주는 가지로 가지가지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