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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비된화살 Sep 24. 2023

스무 살, 내 딸의 남자

내 스무 살을 반추하다. [사진 by준비된 화살]

너무 겁이 났다.


12시인데

딸아이가 집에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귀가를 종용하기 위해

밤 11시부터 전화를 했다.

거의 1시간 동안 10분 간격으로 통활 시도해도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라는 기계음만 되풀이 됐다.


가만히 넋 놓고 TV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남편이 답답하고 미덥지 않았다.

"아니 이럴 때 아빠가 전화해서 호돼게 혼내야 해 그래야 안 그런다니까 무슨 아빠가 저러냐?"

남편은 대답할 듯 말 듯 입술만 쭉 내밀었다 넣었다를 두어 번 반복했다.

조바심이 났다.

별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우겼지만 난 분명히 아들과 딸을 차별하고 있었다.

아들은 성인이 된 이후 밤 12시가 넘어 기어이 외박을 해도 서너 번 정도 왜 아직 안 들어오냐 어디냐 물었을 뿐 그 이후로는 잘 있겠지 생각하곤 전화조차 않고 쿨쿨 잠도 잘 잤다.

심지어 군 제대 후 원룸에서 자취를 할 때도 제대로 된 반찬 한번 싸들고 가보는 모정은 그만둔 지 오래였다.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한 후, 입학 전까지 운전면허를 따겠다며 학원에 등록했다.

실실거리며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스무 살 내 딸이 자동차학원 강사랑 바람이 난 것이다.(난 왜 이 시점에 '바람'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내 감정을 알 수가 없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말도 안 되는 '데이트'라는 달콤함에 '폭력'이라는 무시한 단어를 붙여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이 흉흉하게 돌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언급되는 그 사건이 혹시나 우리 딸아이에게는 괜찮으리라는 믿음은 진작에 버린 지 오래였다.




딸이 처음으로 자동차 운전학원으로 가기 위해 셔틀버스를 탄 날

운행 시간이 점점 늦어져 시간이 촉박해져선지 기사의 운전이 거칠었다.

2~30분의 짧은 탑승에도 멀미가 났다.


안 그래도 워낙 예민한 아이인데... 자동차학원에 내리자마자 구토를 했다.(마침 달려간 후미진 곳이 흡연장소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어려 보이는 친구가 흡연장소로 달려가니 주변 사람들이 안 보는 척 힐끔 대며 수군거렸단다.)

 

구토를 시원하게 하고 교육을 받으러 들어가는데 어떤 남자가 괜찮냐며 생수 한 병을 줬다.




그가 스무 살, 내 딸의 남자이다.

군대를 갔다 왔고,

딸보다 세 살 많다고 했다.

자동차 학원은 가족 사업이라고 했고(사실 믿을 순 없다.)

운동을 좋아한다고 했다.(혹시 가슴팍에 용 문신이 있는 건 아닐까?)

얼굴은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자상하다고 했다.

고작 그 정도의 정보만 알고 있는 난

의도적으로 통화를 거부해야지만 나오는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전화기를 들었다.

한 번에 받는다.

"너 어디냐?"

"응 아빠 집 앞"

"엄마가 엄청 걱정하셔 빨리 들어와! 왜 전화는 또 안 받았어?"

"응 아빠 지금 들어가~"

대답은 안 하고 지 말만 하고는 뚝 끊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를 콕 집어낼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얘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전화를 끊자마자

딸아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온다.

난, 

한 번도 한적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야! 너 미친 거 아니야?

지금이 몇 시인데 이제 들어와?"


엄마의 흥분한 모습이 웃긴 건지,

걱정을 끼친 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그와의 데이트가 만족스러웠는지...


딸 아인 엄마의 극대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깔 웃더니

"엄마야 미안해"라고 하고는 저렇게 생뚱맞게 화장실에 들어가 아이유의 좋은 날을 크게 틀고 샤워를 한다.




내 스무 살도 30년이 훌쩍 지났다.


엄마가 남자친구가 보고 싶다며 한번 데리고 오라고 했다.(상견례 아님 주의-우리 집엔 항상 친구들이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엄마는 그 친구를 딱히 탐탁해하지 않으셨다.

그러 스무 살 된 딸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니, 편하게 한번 놀러 오라고 한 것 같다.

엄마는 무슨 음식을 해줄까? 고민했다. 워낙 음식을 잘하시기 때문에 그게 뭔들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매운 음식을 참 좋아했다.

요즘 말로 *맵부심이 있다.(지금은 그 부심 다 없어졌지만...)

청양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아삭아삭 맛있게 베어 먹던 때니까...


* 매운 것을 참고 잘 먹는 것을 과시할 때 사용하는 언어




마침 잡채 밀키트가 있어 그 옛날 엄마의 매운 잡채를 재연해 보았다. 그것도 엄마의 사랑이었을까?

그날 엄마는 잡채를 하셨다.

그런데 잡채에 빨간 고춧가루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전 처음 보는 비주얼이었다.(지금처럼 다양한 요리법이 없던 그 시절에 잡채는 무조건 간장으로 버무리는 레시피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딸이 매운 걸 좋아하니 이 남자아이도 매운걸 잘 먹나? 궁금해서였을까?

얼마나 우리 딸의 식성을 받아 줄 수 있는 아이인지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였을까?


그 친구는 *맵찔이였는데 땀을 뻘뻘 흘리더니 입바람으로 씁씁 소릴 내며 먹었다.

그리고는 물을 다섯 컵은 더 마시고, 결국 밥을 다 비워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매운 잡채를 먹은 다음부터 친구는 다시는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았다.


*매운 거에 약한 사람



그 후로 

나는 엄마의 매운 잡채 요리를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

엄마는 그때 왜?

하필 매운 잡채를 하셨던 걸까?




우리 아이와 동갑인 딸을 둔 이원장을 만났다.

딸이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매일 귀가 체크하느라 신경이 온통 딸내미에게 집중되어 있단다.


언젠가 딸이 남자친구와 싸웠다고 펑펑 울길래 괜찮다고 그 사람이 가면 다른 사람이 또 올 거라며 오히려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갓 스무 살 된 딸을 둔 엄마들은 왜 그럴까? 나도, 친구도, 그리고 엄마도


아무래도 눈물 나도록 매운 잡채를 하여 그 녀석을 한번 불러봐야겠다.

우리 딸은 매운걸 잘 먹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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