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말이 기분을 만든다
"아빠 아빠, 빨리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야?"
"제가 실수로 책상에 우유를 쏟았어요."
"아아아아아."
"대체 어쩌다가... 너는 왜 이렇게..."
(망연자실 2초 → 나라를 잃은 듯한 참담함 3초 → 내가 우유를 왜 줬을까 깊은 후회 10초 → 참을 수 없는 분노 1분 → 침묵 5분)
"아들, 아빠 혼자 있고 싶어."
(...)
"아빠, 죄송해요. 제가 잠시 딴생각하다가 그랬어요."
"그래, 다음에는 더 조심하자."
"정말 괜찮으세요?"
"그럼, 정말 괜찮지."
"좀 전에 목소리가 컸지. 아빠도 막상 그런 모습 보면 화가 나서 그만. 아빠가 실수, 아니 잘못했어.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럴 수도 있지. 별일도 아닌데.' 따라서 몇 번 내뱉고 나니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신기하게 뜨겁던 마음이 갑자기 확 식어버렸어."
"진짜요?"
"응, 진짜. 그만한 일에 왜 얼굴을 찌푸렸을까, 왜 화를 냈을까. '괜찮아' 한 마디면 아무것도 아닌데."
"다행이다."
"율아, 기분이 말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이 기분을 만드는 게 아닐까?"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면 진짜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 이렇게 간단한데 왜 어려운 거지. 생각하기 나름일 뿐인데."
"저는 잘해요. '율이는 기분 좋아요.'"
"아빠도 이제 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소리 내서 말해야겠다."
"'그럴 수도 있지. 별일도 아닌데.' 맞죠,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