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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비 Jul 13. 2023

아빠도 꿈이 있었네

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56

#56 쉰여섯 번째 밤_아빠도 꿈이 있었네


햇살 좋은 오후였다. 시시한 농담을 나누며 아이와 모랫길을 걸었다. 파도와 모래가 만드는 경계선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돌아보니 삐뚤빼뚤 모랫길에 새겨진 발자국이 차츰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아빠, 여기 진짜 진짜 좋아요."

"좋지?"


"아들, 아빠 옛날에 여기에서 살았어."

"아빠 젊었을 때?"


"지금은 늙었니?"

"아니요. 하나도 안 늙었죠."


"삐-. 틀렸어."

"네?"


"정답은 여전히 젊으세요."

"우와 100점."


이 친근한 바다와 이 익숙한 모랫길이 낯설 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유난히 짜고 비릿한 바다냄새 때문인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이 녀석 때문인가.


그렇구나. 점점 말이 많아지는 이 녀석을 어떡하지. 하마터면 골똘해질 뻔했다.


"아빠는 젊었을 때 꿈이 뭐였어요?"

"젊었을 때?"


"율이 아빠 되는 거."

"이번에는 30점. 젊었을 때 말고 어렸을 때요."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아빠는 꿈이 없었다고."


아이는 나의 어린 시절의 꿈에 관해 종종 묻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답한 적이 없다. 기억해 내려 아무리 애써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이는 아직도 수의사가 꿈이야?"

"네. 강아지랑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요."


"율이는 좋겠다. 꿈이 있어서."

"아빠는 왜 꿈이 없었어요?"


몇 번의 질문을 받고서야 알았다. 어릴 적, 내일을 꿈꾼 적이 없다는 사실을. 미래나 꿈은 내게 너무 먼 단어였고, 어릴 적 내가 아는 세상이라곤 등뼈 같이 이어진 골목이 전부였다. 어디로든 이어지지만 쉽게 길을 잃어버리는 골목, 아직도 그 골목이 생생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 눈앞의 세계가 너무 좁았던 거야. 그래서 닮고 싶은 사람을 찾지 못한 거야."

"닮고 싶은 사람?"


"어린 시절에는 닮고 싶은 어른을 보면서 꿈을 꾸게 되잖아. '우와 저 아저씨 멋지다. 빨리 커서 저 아저씨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빠 주위에는 그런 멋진 어른이 없었어."

"학교 선생님은요?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 많잖아요."


"선생님도 마찬가지였어. 자기도 지키지 못할 이야기를 하면서 매일 혼내는 어른들밖에 없었어. 어른들은 모두 다 무서운 사람이었어. 그래서 아빠는 딱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던 것 같아.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어."

"무섭지 않으려고요?"


"응. 무섭지 않으려고. 그래서 아빠는 무섭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미안해 율아. 아빠도 무서운 어른이지?”

"네. 화내실 때는 많이 무서워요."


"미안해, 아들. 미안해서 어쩌지. 아빠가 노력할게."

"약속."


"그래, 약속."

"근데 아빠도 꿈이 있었네요."


"아-. 그러네. 아빠도 꿈이 있었네."


나도 꿈이 있었구나. '좋은' 어른이 되려는 꿈이 있었구나.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서야 깨닫는다. 꿈이란 건 '대상'이 아니라 '수사'라는 사실을, '무엇'이 아니라 '어떤'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없다. 나는 모랫바람에 사라질 희미한 발자국이라도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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