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쉰다섯 번째 밤_알록달록한 세상을 위하여
우리 아파트에는 길고양이 다섯 마리가 산다. 치즈, 라떼, 까진코, 후빈코, 피난코. 이름만으로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는 이름들이다. (물론 나는 잘 구분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치즈 한 마리였는데 차츰 늘어 이제 다섯 마리가 되었다. 아무래도 동네 고양이들에게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났나 보다.
"아빠, 저기 차 밑에 치즈랑 까진코예요."
"어떻게 알아? 그냥 보면 알아?"
"네, 보면 알아요. 그렇게 생겼잖아요."
"우와 아빠는 한참 봐야 알겠는데, 우리 아들 대단한데."
"쟤들은 맨날 저기 들어가 있네. 위험하지 않나?"
고양이는 차 밑을 좋아한다. 여름에는 햇볕을 피하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차 밑으로 모여든다. 굳이 차 밑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도시의 거리에서 차 밑만큼 안전해 보이는 장소도 없을 듯하다.
내가 사는 곳은 지어진 지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로 요즘 지어진 아파트와 달리 지상으로 차가 많이 다닌다. 처음에는 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무사하고 태평하다.
보면 볼수록 영민한 아이들이다. 나는 얼마 전 치즈가 좌우를 살피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것도 무단횡단이 빈번한 이차선 도로에서.
"그래도 여전히 잘 지내네. 돌봐주는 사람이 있나 봐."
"저기 나무 아래에 보면 상자로 된 집도 있고 밥그릇도 있어요."
"율아 이거 주고 와."
"네, 아빠. 그런데 지난번에 고양이 먹이 준다고 뭐라 하는 아저씨가 있어서..."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이를 따라 나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우리 동네에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 꽤 많다. 그런 만큼 먹이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양보하기 어려운 각자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는 어렵다.
"괜찮아. 아빠 있잖아. 저 아이들도 먹고살아야지."
"조금 무서워요."
아이는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도 한 번 더 주변을 살핀다. 나쁜 일을 하는 걸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일으키는 소음이나 쓰레기 문제 등을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빠가 줄게."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줄게요."
하지만 길고양이가 일으키는 문제의 원인은 본래 고양이를 버린 나쁜 인간들에게 있다. 고양이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길고양이의 삶을 가엾게 여겨 먹이를 주는 이들을 넉넉한 품으로 품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내게 해법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저 눈앞의 생명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도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아주 최소한의 방식으로만.
누군가는 별다른 의미 없는 일이라고, 자기만족에 불과한 일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뿐이다. 그래도 나로 인해 한 생명이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율아."
"네, 아빠."
"고양이가 잘 먹으니까 좋지?"
"네, 예뻐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빠도 잘 몰라.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말이야 지금 눈앞에 있는 생명을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돌아서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마음이 쓰인다.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책임의 문제가 아닐까. 필요하다면 기꺼이 누군가의 악당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알록달록한 세상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