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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비 Sep 04. 2023

새벽을 기다리며

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61

#61 새벽을 기다리며


아이와의 대화를 기록한 지 2년이 다 되어갑니다.

한 번쯤 매듭이 필요할 것 같아 '맺음의 말'을 기록해 둡니다.


계속 기록을 이어갈지 기억에만 담아둘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걸어가겠습니다.



1

2020년 어느 날 무기력증이 찾아왔습니다. 간단한 작업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모든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상황을 떨쳐내려 발버둥 칠 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숨겨야 했으니까요. 안간힘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츰 모든 것이 사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저 자신조차도 말입니다.


생활을 위해 일 년, 이 년, 삼 년을 버텼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어느 날 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과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에 내내 시달렸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장 난 시계처럼 '툭' 제 시간은 멈춰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이 외로웠습니다.


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 고독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아이와의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빠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나'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무기력과 불안에서 벗어나 삶의 중력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이와 약속을 했습니다. 너와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겠다고.

앞으로 제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아이와의 약속은 지키고 싶습니다.


"아빠는 지금 진짜 아빠를 찾고 싶은지도 몰라. 다 잃어버리고 남는 것, 그게 진짜일 테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아이는 잘 키우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2

이 글은 제 아이의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글이 진행되어 갈수록 '오늘'이 '내일'로 이어진다는 감각이 없었던, '스무 살의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에 부제를 붙인다면 '스무 살의 나에게'가 되지 않을까요.


왜 스무 살인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게 스무 살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시간이며, 그래서인지 견딜 수 없이 후회가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빠는 스무 살 때가 가장 후회가 돼.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스무 살로 돌아가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3

주말이 되면 아내와 아이와 함께 어디로든 나들이를 가려고 합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종종 좋은 문장을 만나게 됩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의 안내서, 공원이나 산책로의 표지판에서도 '의미'로 다가오는 문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공감이 되는 그런 '짧은 문장' 말입니다.


"율아, 이 문장 좋다."

"별이 쏟아지면 당신의 영혼은 깨어난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색다른 것'을 욕망하지만 결국 나와 '비슷한 것'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난해한 문장이나 장황한 설득이 아니라 짧은 문장에 담긴 그런 '평범한 진실'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뜻밖의 만남을 통해 여태까지 저를 억누르던 후회, 자책, 걱정을 덜어내고 지금의 나를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문장을 읽으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다른 세상과 통하는 문을 연 기분을 마음껏 맛봅니다. 제가 쓰는 글에도 언젠가 '말의 영혼'이 깃들기를, 그 영혼의 힘이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4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서 좋든 나쁘든 뜻한 대로 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은 크고 작은 '선택'들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입니다. 이 도 그러한 '결과'이며 또한 어떠한 결과를 빚어낼 하나의 '씨앗'입니다.


오늘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 기대가 됩니다. 언젠가, 어쩌다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새벽을 기다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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