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설렘도
아무런 기대도 없지만
그래도 그와 결혼'식'을 한다는 마음만은 한껏 달아오른 아침이 밝았다.
별 것 없는 준비임에도 결혼'식'은 '식'인 지라 오전 7시부터 근처 샵에 가서 화장과 머리를 만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지인들이 속속 도착해 나의 꾸밈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대~충 하려던 내 맘과 달리 면사포를 쓰지 않지만 꽂이는 해야 하지 않느냐
얼굴이 너무 어둡게 나왔다, 옷은 이것보다 저거 입어라(당일에!!) 등등
아, 결혼'식'이 이런 거지, 잊힌 기억을 되새기며
응응.. 모두에게 맞춰 꾸밈을 끝내고 나니 9시.
엄마를 모시고 근처 단골미용실로 가 머리를 다듬었는 데
원장님이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묻길래 오늘 식 올린다고 말씀드리니
그와 나의 단골미용실이라 우리 스토리를 다 아시는 원장님이 엄마머리가 끝나고 봉투를 넌지시 건네주셨다.
아, 첫 축의금!! 감사합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호텔에 가족과 지인이 대거 묵고 있어 식장에 짐을 풀어놓고 인사를 하기 위해 룸으로 올라가니
미처 연락하지 못한 지인들이 와있는 것이 아닌 가.
20년 전 한 부서에 근무했지만 이후 팀이 없어지면서 흩어졌다가
내가 총무가 되어 일 년에 한두 번씩 만나거나 여행을 다녔던 터라 드문드문 안부를 전했는 데
제주 내려와서는 아무런 소식도 주고받지 못했는 데 우연히 내 결혼으로 내려오는 지인으로부터 얘길 들었노라며 그냥 있을 수 없어 함께 내려왔다는 말에 갑자기 울컥!
그렇게 아침부터 서로 눈물바람의 인사를 나누는 데 눈물이 쏙 들어가는 지인의 한마디
"남들 다 이혼할 때 왜 결혼해?"
덕분에 눈물은 쏙 들어가고, 크게 한번 웃고 나니 결혼'식' 시간이 도래하여
밑에서 만나자는 인사로 드디어 행사를 치르러 1층으로 내려갔고 하객들은 속속 도착하였다.
우당탕탕 얼렁뚱땅 급조(!)하다시피 한 결혼'식'은 엄마의 축가에 눈물 펑펑
방송경력 수년이지만 결혼식축사는 처음인 전 직장동료의 떨리는 축사에 눈물 펑펑
이 십년지기 지인의 축가(너무 열심히 부르는 데 너무 못...)에 웃음팡팡
결혼식 내내 하도 웃었더니 예쁜 사진 한 장 없고 온얼굴을 찌푸려가며 함빡 웃는 사진만 가득 남기고 끝이 났다.

길게는 삼 십 년
짧게는 1여 년
서울살이부터 제주살이까지 나의 삶의 궤적에 큰 울림을 준 이들이 모두 한자리에서 건네는 축하는 기대이상,
상상한 것보다 더할 나위 없는 이상적이고 몹시 기쁜 시간들이었다.
소박함으로 시작한 결혼식은
'나'다운 알찬 결혼식'이라는 인사로 돌아왔고
모두의 응원과 축하로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다.
또 식사하러 가는 팀과는 별개로 우리가 만든 식장이 마음에 들었는 지
개별로 사진찍기 요청이 들어와서
신부대기실에서 찍는 기분으로 우린 모두와 마음껏 사진찍고 인사를 나눴다.
'난 네가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언니는
결혼식 당일, 식장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동생 먼저 가서 어떡하니?"라는 소리만 잔뜩 듣고 기분이 다운이었다가 같이 활동하는 동호회 사람들이 방문해 약간 업이 되었다, 엄마의 뒤치다꺼리에 또 다운이 되는 등..
점심만 먹고 사라지려던 계획은 초장부터 없어졌고,
'그래 이왕 살 거면 결혼식을 하는 게 좋디'라며 초긍정모드였던 엄마는
식이 끝나자마자 함께 온 친구와 여미지식물원을 시작으로 제주 여행을 떠났고,
결혼식 참석 겸 여행을 온 그의 가족들 역시 식이 끝난 뒤 별도 예약한 일정대로 쿨하게 떠나셨다는 것.
서로가 바쁜 탓에 당장 신행을 가지 않았지만 나의 결혼'식'을 계기로 오래간만에 모인 지인들과 서귀포 구석구석을 몰려다니며 원 없이 사진 찍고(메인사진처럼) 웃고 떠든 3박 4일이 지나고 모두를 비행기태워 보낸 이후에 느낀 후 소감은 아, 결혼'식' 참 잘 했다.
꼭 결혼식을 할 필요가 있을까?
처음의 모호하던 결정을 안고 시작했지만 무탈하게 끝나고난뒤
그간 양어깨에 내려앉은 묵직한 책임감이 삶을 이끄는 주춧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의 부스러기 같은 감정들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음을 느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간 나의 오랜 연인을 '같이 사시는 분'이라는 소개에서
'남편'이라고 소개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니와도 이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였다는 것이
결혼'식'을 함으로 인해 결론내려졌다는 것.
그리고 이젠 빼도박도 못하게
이젠 정말 뒤로 물릴 수 없는 '가족'이 되어버렸고
언니도 그와 함께 사는 시간을 견뎌야 하고
그도 고양이와 함께 사는 시간을 견뎌야 하니
그들로선 서로 원하지 않았던 결론이지만
이또한 해피엔딩으로 가는 걸음임을 자각하는 이벤트였길 기대해 본다.
#한지붕세가족 #그렇게그들은가족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