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건 나눠 갖자
우리 가족에겐
한 조직에서 선물이 각각 제공된다.
명절 선물, 각종 행사 및 상조의 답례품이 겹치고, 직접 수령할 경우 1명이 3개를 같이 받아오거나 어느 땐 누가가든 전달해주시는 무조건 3개를 챙겨주신다.
그 조직과의 처음 연결고리는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2013년 제주로 거주를 옮긴 뒤
오로지 그냥 먹고 놀기위해 최선을 다하던 난, 제주의 다양한 삶을 최선을 다해 체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활동하곤 했다. 그 중 제주3대 괸당이라 불리는 조직에서 2014년부터 봉사를 시작했는 데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가입하자마자 총무를 맡았고, 나이가 어리다는 단순한 이유로 무한한 애정을 받았다.
(※괸당이란? ‘괸당’은 ‘권당(眷黨)’에서 비롯된 말로,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 혈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섬 지역 특유의 정서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제주성 단어)
총무로 약속된 2년의 기간이 끝나자마자 무방위적인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조직의 모회사로 들어오라는 스카웃(!)제안을 받았고 제주이주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때의 내 마음은 무보수 봉사로도 하는 일, 돈받고 제대로 해보자는 얄팍한 마음이 일순위이고, 3년간의 민박운영에 지친 몸과 마음에 안정적인 수입을 받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3~4년동안 조직의 변두리에서 떠돌며 알게된 얇은 지식으로 특별한 인수인계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조직의 長부터 맡다보니 막중한 책임감과 봉사활동에서 계획한 나름의 파란 꿈을 안고 시작했다. 그러나, 큰 조직에서 톱니바퀴같이 일하던 예전과 작은 조직이지만 전체를 장악하며 사업마다 적절한 피드백을 줘야하는 수장은 그 역할이 하늘과 땅차이였다.
기존의 시스템을 따라가되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남들의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할 경우 역량을 조금만 발휘하면 수장의 눈에 띌 수 있고, 새로운 업무일 경우 명확한 인수인계 및 시스템안에서 기존의 규정과 조직 간의 합의를 통해 답을 얻어낼 수 있고 그 책임은 조직이 나눠지던 기업 시스템에 익숙하던 내가 사업의 시작과 끝, 구성원의 교육과 진행과정 체크, 무엇보다 사업에 대한 완벽한 이해, 운영에 대한 결과까지 내 몫으로 돌아왔을 때 체감하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적다보니 한풀이... ㅎㅎ)
퇴사 후 4년이 지난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조금의 체력과 여유가 있었더라면 시간이 더디가더라도 어떻게든 자리를 잡았지 않았을까 곱씹어보지만 그때의 나를 돌아봤을 때, 열정은 무한했으나 체력은 저질(갑상선과 대상포진의 대환장파티)이었고 두드러지지 않는 성과에 스트레스만랩의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이성을 찾을 새 없이 감성만 폭발하고 매일매일 눈물콧물 쏟아내며 출퇴근하다 입사 1년을 겨우 넘긴 어느 날, 이렇게는 못살겠다며 퇴사를 결정했었던 것 같다. (남들은 제주직장생활은 꿈의 직장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 곳이 제주든 서울이든 강릉이든 직장은 직장이다. 단지 제주의 직쟁생활은 비행기값이 들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마흔 넘어 눈물콧물 쏟는 시간에도 나에 대한 한계가 문제이지 조직은 문제없다 생각한 건지, 끊어진 봉사활동의 명맥을 잇고싶어 언니에게 내가 들었던 봉사교육을 추천했다. 당시 언니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 병]의 초기단계라 단순알바의 반복과 물에 뜨지 않는 수영 n년차라 몸과 마음이 바닥인 터라 내가 느꼈던 제주생활의 즐거움과 활력을 느끼게 해주고 제주이주 4년차임에도 발이 닿지 않은 제주생활에 조금이라도 더 딛게 하려는 의도로 교육비를 지원하며 단계별 수업을 듣게 했다.
나의 눈물콧물의 원천인 곳에서 받아야하는 교육을 탐탁치않아했고 자발적이지 않다보니 이걸 받아봤자 무쓸모100%라 장담했지만 조직생활과 봉사생활은 다르다는 나의 설득에 억지스러운 교육은 마무리되었다. 지금생각해보면 난 그 정신없는 시간에 왜 우겼나 지금의 나로선 이해되는 부분이 모호하지만, 결론적으론 언니는 2년 뒤 조직의 한 지역성 사업에 계약직으로 채용되었고 지금까지 매년 재계약을 통해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
제주에선 기존 경력을 살리는 일은 굉장한 전문직이 아니고선 직장을 구하기 쉽지않다. 더군다나 40대 중후반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일은 더 좁을 수 밖에. 그러한 때 시작은 억지스러웠을 지언정 결과는 만족스러워 이에 대한 인사는 "동생을 낳아줘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엄마에게 전해졌다는 아름다운 결말과 함께 두 번째 직장동료가 언니가 되었다는 얘기.
남친은 그럼 언제 같은 조직원이 되었을까?
그 또한 나와 같은 날 같은 조직의 봉사교육을 받았다. 같은 기수로 함께 교육받고 같이 봉사 활동을 하며 같이 연애하다 봉사회의 총무역활을 같이 수행하게 되었다.
나를 조직의 수장으로 추천하며 응원한 사람도 그이고 고된 직장생활동안 나의 푸념을 들어준 것도 이후 퇴사를 권유한 이도 그다. 나의 힘든 시간을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와 나는 조직의 봉사에는 진심인 사람들이라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 순수봉사자의 마음으로 몇 년을 힐링하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제주이주 후 한번도 쉬지 않고 직장생활을 이어간 그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고 제주에 최적화된 다양한 업무(관광업, 부동산, 산림 등)를 통해 점차 제주성 전문역량을 키워나갔다. 그러면서 내가 그러했듯 그 역시 제주의 젊은 피로 연로해지는 봉사조직의 세대교체의 선두주자로 언급이 되고, 요청한 일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최근 1~2년은 봉사자이지만 조직의 핵심에 근접하곤 하였다.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봉사인 지 그 구분이 어느 날부터 하도 모호하여 이렇게 일할 거면 차라리 조직원이 되라는 나의 진담섞인 농담이 허공에 흩어지기 전, 이전 회사와 약속한 시간이 끝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작년 12월 조직의 팀장으로 입사, 우리 가족의 세번 째 직장동료가 되었다.
언니는 입사하자마자 누구의 언니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더니 이젠 누구 팀장의 처형이라는 꼬리표로 바뀌었다며 투덜거리고 그는 봉사자에서 직원으로 자리가 바뀌어 내가 겪었던 것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의 초기에서 혼란을 겪기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모두 만족스러운 조직생활을 영위중이다.
얼마나 좋은 회사이길래 한 가족이 같이 다니나 싶겠지만 제주라는 사회 자체가 워낙 좁고, 봉사와 일상을 같이 할 수 있는 제주 생활을 유지하자는 게 목적인 우리의 삶에서 조직은 공통분모가 되었고, 같은 이슈로 같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일도 가끔 일어나 각 자의 기준에서도 만족을 끌어내어 당분간 조직의 관리는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린 같은 회사를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