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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Oct 02. 2022

내 얘기를 안하려던 건 아닌데 하고 있던 것도 아니야

소중했던, 만 유효한 기억

나: 졸업하고 오랜만에 학교 근처에서 '누구도 불러 누구도 불러'해서 동아리 술자리가 만들어졌어. 술 한창 마시는 도중에 한 선배가 나한테 '오월아, 나는 네가 궁금하지만 우리한테 네 얘기를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네 선택이니까. 그래도 누군가한테는 꼭 네 얘기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거야.


너: 갑자기?


나: 응. 분위기가 어색하거나 그러던 중에 나온 말도 아니고 북적북적한 술자리에서. 아마 전부터 나한테 한 번 하고 싶었던 말인가 봐. 20대 시절 내 얼굴이 또 유난히 어둡기도 했고. 암튼 평생 그런 얘기를 처음 들어봤어.


너: 그렇지. 누구나 해줄 수 있는 얘긴 아니지.


나: 그니까. 사회성이 적당히 좋은 나는 북적북적 분위기는 맞추고 있었지만 내 얘기를 하진 않고 있었던 거고 그걸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생각한 거.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진짜로 내 얘기를 거의 누구에게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 충격.


너: 우리가 그즈음에 혹은 그 이후에 더 자주 만났나?


나: 그러게, 그즈음인 듯. 그때, 네가 나의 논리적이기도 않고 감정 흐름만 가득한 얘기들을 함께 해줘서 도움이 많이 됐어.


너: ㅎㅎㅎ 그랬나. 그럼 남들은 어떤 얘기를 하지?


나: 내 인생에 동아리가 크게 차지하고 있어서 동아리 얘기를 좀 더 하자면. 동아리에 어떤 사람들은, 불만이 있을 때 그걸 입 밖으로 냈어. 그 불만을 따르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아니다 그런 걸 떠나서 동아리 자체, 공연을 진행하는 방식, 아니면 사람에 대한 불만들이었어.  

'이 동아리는 파시스트야!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라며 문을 꽝 닫고 나갔는데 담 공강에 어김없이 동아리실에 돌아오고

회의시간이 길어지거나 산으로 갈 때 발언을 끊으려고 하면 '왜 얘기를 들어주지 않죠?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돼요?'라고도 하고

너 내가 잘 모른다고 무시하는 거야? 너 '***( 전문용어)' 알아? 내가 잘 아는지 모르는지 왜 네가 판단해? 라면서 유치한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인 성향이 강한 회장에 대해 자기희생이 강했던 선대회장들이 진지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하고

기억 속 나는 이 현장에서 불만을 표현하기는커녕 불만자들에게 '워워'하고 있어.


너: 나도 그랬을 거야. 아니면 다른 무리랑 술 마시거나.


나: 어쩔 땐 공감하고 어쩔 땐 이해가 안 됐지. 어쨌거나 큰 소리로 불만을 표현한 멤버들의 입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그들을 애정 했고 그들이 있는 동아리실이, 동아리가 좋았어. 안타깝게도, 나는 '갈등을 표출해도 우리 관계는 괜찮다', 는 학습은 못하고 '저 사람은 갈등을 표출하기도 하는구나'라는 관찰만 했다야.


너: 정말 고등학교랑 대학교는 완전 다른 사회였어. 고등학교는 뭐랄까, 다들 고만고만한 것 같으면서도 가까운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고 근데 안 가까울 수 없는 그런 게 있었고, 대학교는 달라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고 경험하지 않았던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도 같이 있는 게 불편하지 않았어.


나: 맞아 맞아, 정말 그랬어, 참 달랐어.


3학년 때인가, 평소에 잘 화내지 않던 동기 중 한 명이 정말 크게 화가 나서 '사과하라'며 한 후배를 위협한 적이 있어. 아무도 술 마시거나 취한 건 아니었어. 학교 근처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갔더니 친구는 여전히 화가 많이 나 있었어. 이유를 들어보니 그 둘의 대화 중 후배가 '**학번 선배들(당시 운영진인 내 학번)은 열정이 부족하다'라고 한 거야. 그 얘기를 들은 동기가 '네가 뭘 안다고 우리 학번에 대해 함부로 말하냐'면서 화를 냈더라고.


너: 어이구야


나: 나도 현장에서 '아이고' 이상의 반응이 안 나왔어. 후배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를 들킨 것 같기도 했고. 그때 그 말을 나는 나로 해석하느라 내 다른 동기들의 열기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 친구는 우리 동기 덩어리에 대한 공격이라고 본 거지.


너: 음, 나는 내 맘에서 갈등이 생겨도 말도 안 되는 합리화로 누르며 회피하는 거 같아.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뭐’, 라거나 ‘지가 뭔데 단정 지어 말해? 어이없어’하며 무시하며 그러지 말라고 이성 범위 안에서 뭐라고 하는 정도였을 거야. 나도 감정이 이성을 누르고 튀어나오는 내 모습이 잘 상상이 안돼.


나: 나도. 이제와 생각해보면 나는 어떤 조직이든 꽤 빠르게 적응해도 어떤 조직도 나와 동일시하지 않더라고. 동아리가 나에게는 아마도 다시없을, 너무 큰 의미였는데도, 동아리나 멤버의 흥망성쇠에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엇, 이거 매우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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