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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May 12. 2023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

하지만 꼭 필요한 오해

나: 번아웃이 온 것 같아


너: 왜, 학생들 시험 때문에?


나: 응 맞아. 참 내 탓이 아닌 걸 알면서 시험이 목전일 때는 항상 자책하는 마음이 생기네. 내가 더 도움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런.


너: 이 얘기를 이 시기마다 반복하는 거 알고 있냐. 후련함을 느끼는 게 목표인 거 아녔어?


나: 쉽지 않네 거 참.


너: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걸 한 거야. 네가 작정하고 '이건 가르치지 않겠다', '네가 이걸 모르지만 피곤하니까 그냥 넘기겠다' 이런 거 아니잖아. 아이가 모르는 걸 계속 발굴해서 설명하려고 했고 감을 잃지 않게 하려고 계속 노력했고. 네 말대로 네가 시험을 대신 칠 수 있는 것도, 채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제 네 손을 떠난 거지 머. 지금 지쳐서 오만 가지 잡념이 너를 장악하는 중인 듯.


나: 그것도 맞아. 한 학생이 시험 마치고 '선생님 덕분에 끝까지 올 수 있었어요. 뿌수고 왔습니다, 부수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런 메시지를 보냈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걸 방치하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없는 건 내 소관일 수 없으니 마음을 정리하겠다.


너: 그래그래. 오늘 아침에 딸이랑 싸웠어.


나: 왜 왜.


너: 요즘 옷에 대한 고집이 심해. 그래서 월수금은 자기가 결정하고 화목은 내 의견을 듣기로 약속했거든. 근데 안 지키고 또 한 한 달 동안 매일 입고 있는 그걸 또 입고 나가겠다는 거야!


나: ㅎㅎㅎㅎㅎ 웃어서 미안.


너: 옷을 빨아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내가 거의 똑같은 옷을 샀어 상하의 둘 다. 하의는 갈아입더니 다시 요걸로 한 달은 입을 거 같고, 상의는 입지 않겠대! 그래서 지금 날씨에 너무 더울 거 같은 그 티셔츠를 입고 나간다고 억지를 억지를..


나: 아 같은 옷인데 두께만 달라?


너: 거의 그래. 나의 거의가 딸의 눈에는 정말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나: 딴 얘기지만 내가 그래서 엄마한테 선물을 못해. 나는 엄마 스타일대로 산다고 사도 엄마 절대 안 입으심. 암튼 그래가지고.


너: 그래가지고 애랑 실랑이하다가 시간도 쫓기고 짜증이 나가지고 '네 맘대로 해!' 이렇게 됐지? 그랬더니 울면서 '엉엉.. 엄마가 입으라는 거 입을게 그럼, 엉엉.' 그래. 음.. 내가 이긴 거니 이게? 난 이겨먹을 의도가 없다고!


나: 애매하다야. 너는 아이의 취향을 망쳤어!


너: 그거 뭐라고 나도 억지를 부렸나 싶어서 마음이 안 좋아. 내 기준에서 좀 빨았으면 싶긴 하지만 옷이 냄새나는 것도 아니고 더우면 자기가 알아서 깨우칠 텐데. 자기 입고 싶은 거 입고 나가야 친구들 만나서 놀 때 기분도 좋을 거고 말이야. 만약 내가 회사 가는데 남편이 '야야 옷 그거 좀 별론데?' 이러면 얼마나 짜증 나겠어.


나: 억지 부리고 엄마말 안 듣는다고 엄마한테 혼나는 그 패턴. 분명 네 딸은 열심히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을 거야. 비록 아직은 이 옷 입고 나가고 싶어 한마디 밖에 못하겠지만 뭐 이 옷을 입고 나가면 시크릿쥬쥬가 된 기분이라든지, 그 옷을 입고 그네에서 뛰었을 때 멀리 뛰었었다던지, 아니면 그 비슷한 옷을 입지 않은 어떤 아이가 친구들이랑 못 어울렸다던지. 아니면 진짜 좋아서, 그 하나가 이유일 수도 있겠지. 그러면 좋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야 엄마? 하고 따질 수도 있었을 텐데.


너: 건강과 관련된 것, 예를 들어 식사를 하지 않겠다든지 약을 먹지 않겠다! 그런 건 내가 관여하겠지만 나머지는 좀 여유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 그래. 나는 요즘 내가 학생들을 학대하는데 일조하나 싶은 마음이 들어.


너: 이번에는 후유증이 좀 더 다층적인데?


나: 그러게. 고2, 고3들한테는 그런 맘이 안 드는데 그보다 어린 학생들, '필요하다고는 해서 어쩔 수 없이 하긴 하는데 나는 수학이 너무나 싫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찬 학생들을 수업할 때 특히 그래. 어떻게든 수업만 해치우려고 하거든.


너: 움, 그래 그렇지. 성적도 잘 안 오르겠다.


나: 그것도 그렇고 내가 여러 번 말한 대로 굳이 수학에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싶은 거야, 수학이 뭐라고. 논리적 사고가 수학뿐인 것도 아니고 논리적 사고 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야. 그냥 모든 공부를 다 싫어하는 학생도 있고 진짜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들도 있거든. 잘 못하는 거랑 싫어하는 건 완전 다른 문제고. 암튼 그래서 요즘 생각이 또 많아.


너: 내 동생은 나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 아무리 봐도 동생과 나는 서로 잘하는 부문이 다르거든. 아마 내가 조금 더 학창 시절 시험에 필요한 능력을 갖췄나 보지. 동생은 전혀 내가 생각할 수도 없는 단계를 뛰어넘은 사고를 하기도 하고 깊어. 그동안 동생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내비치면 '아니야 우리는 각자 잘하는 게 다르고 나 역시 너의 많은 부분이 부러워' 그랬거든.


나: 그래 그래.


너: 며칠 전에 같이 술 마시다가 들은 얘기인데 어렸을 때 아빠가 얘를 방에 무릎 꿇게 하고는 '너는 네 언니만큼 할 수 있는 애가 아니다' 그랬다는 거야. 앞뒤 맥락을 모르겠지만, 너무너무 충격받았어.


나: 아이고 그랬구나. 게다가 너는 너무 좋은 언니잖아, 더 힘들었겠네.


너: 그건 무슨 말이야.


나: 잘못은 아버님이 하셨지만 미움은 너를 향해 있었을 텐데 너를 미워할 기회가 없으니까. 너를 미워하려 하다가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어서?


너: 그럼 나쁘게 굴어? '야 너는 나 절대 못 따라와' 막 그래?


나: ㅎㅎㅎ 그건 아니고, 네가 어머님 얘기를 할 때나 동생 얘기를 할 때 다들 너무 착하고 다정해서 더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어렸을 때 오빠를 빌런으로 생각했고 그때 나는 오빠가 알고 보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던 거 같아. 이제와서는 그 마음이 너무 다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또 내가 사춘기를 겪어내는 방법이었나 보지. 암튼 그래서 미워할 대상이 있으면 충분히 미워하고 좋아할 대상이 있으면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면 감정의 화살이 적어도 자신을 향하지 않을 거고 조금은 더 간단해지려나 싶어서 괜히 던져본 거야.


너: 움. 그러면 또 그 이유 때문에 힘들었을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나한테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나와의 관계를 역전했다고 했잖아? 생각해 보면 나는 입 밖으로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됐어,라고 말하고는 하지만 여전히 충분히 엄마를 보듬지 못하는 나를 자책해, 그러고 싶지도 않으면서.. 그냥 그때 엄마는 미성숙했을 뿐이라고 나를 설득해.


나: 네가 너를 설득한 들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여전히 어머님은 너에게 의지하실 거고.. 아마 어머님은 그게 어머님이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


너: 그게 나를 더 숨 막히게 해.


나: 훕 그래. 어머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게 막막한 게 지금 가장 큰 문제 같아. 작게나마 무언가를 해서 관계를 틀어보는 건 어때. 엄마와 딸의 관계 말고 다른 관계로써 무언가를 부탁해 본다던지?라고 말하면서 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 너는 엄마를 외면하거나 받아들이는 두 가지 옵션을 가지고 있는데 둘 다 네 맘이 하나도 안 편하잖아. 우리 자꾸 인생에서 당장의 최악을 피하려는 방식을 채택하다 나머지 악을 선택하고야 만다고. 그게 또 다른 최악이라는 걸 알면서..


너: 해나 개즈비​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어. 그녀는 성소수자인데,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소재로 삼다 보니까 아무래도 얘기가 다듬어지겠지. 사실 자기 이야기가 상처 투성이에 웃기기만 한 소재도 아닌데 우습게 전달해야 하고, 그 뒤에 숨은 더 잔인한 스토리는 꺼내놓지 못하는 거야. 코미디언이라는 역할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그녀가 스스로를 '잔인한 일을 당해도 싼'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거 같더라고. 그래서 자기를 더 이상 누군가의 재미를 위한 소재로 쓰기보다 직면해야겠다고 결정했대. 그동안 스스로를 갉아왔다고 생각하는 듯.


나: 복잡한 일들은 복잡하게 접근해야 해.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을 해결하지도 극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거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아니면 그랬다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할 것 같아.


너: 오빠랑 일하는 건 어때?


나: 인생을 배운다 내가 아주.


너: ㅎㅎㅎㅎ 얘기해 봐 봐.


나: 나도 적당히 공부하면 그에 대한 적당한 성적이 나오던 학생이었어. 그니까 적어도 하는 만큼은 얻어내는 인생을 살았지. 그보다 더 얻는 건 별로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아. 주식 등 불로소득을 바라기도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너: 그래그래.


나: 오빠는.. 자꾸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말해. 내가 보니까 오빠는 자기가 무엇을 할 줄 모르는지,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 구체적인 상이 없어서 그걸 전문가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아. 전문가=해결사인 거지.


너: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전문가.. 어디 있니.


나: 그게 나와의 차이인 거야. 그래서 내가 적당히 해서 '요런 거?'라고 제시하면 그거래. 그니까 그게 전문가가 필요한 정도는 아닌 거지. 나처럼 초보자인 사람도 반나절이면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일도 오빠는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


너: 움.


나: 그게..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 그런 삶의 태도를 내가 배워왔구나 싶었어. 나는 내가 전문가나 해결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무슨 일이든 전혀 모르는 일이더라도 일단 직접 시작하더라고.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처음부터 전문가를 찾지 않아. 내가 뭔지도 모르는 걸 전문가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오빠는 아마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막막하다는 기분에 압도되는 거 같아. 나보다 그 스트레스 지수가 훨씬 높으니까 그게 벽으로 느껴지는 거지. 그런 벽에 계속 직면하면서 살았구나 싶어서 마음이 안 좋더라.


너: 그래도 해결사가 해결해 주면 그것 역시 좋은 방법 중 하나잖아.


나: 그게 내가 구체적인 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상대가 뭘 해도 어디까지 만족해야 하는지도, 잘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잖아,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러면 관계에 흠이 나고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너: 아이고 마음이 아프다.


나: 우리가 어렸을 때 시험이 아니더라도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기분을 느낄 기회가 많아야 할 텐데, 그게 너무 아쉬웠어. 맨땅에 헤딩을 해서 튀어 오르는 것과 헤딩을 하는 순간 공이 망가지는 건 다르니까.


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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