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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May 20. 2023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설득할 자신이 없거나

나: 최근 신경 쓰는 일들이 좀 있었어.


너: 말해봐 봐.


나: 매주 영어 기사를 읽고 해석하는 온라인 스터디에 참여하거든. 혼자서는 맨날 한국사이트만 오가니까 요거라도 하자 싶어서 하고 있어.


너: 오, 근데.


나: 기사를 읽은 다음에는 단어 퀴즈 시간이야, 서로 질문하고 답하고. 갑이 몇 개를 질문하면 을이 답하고 을이 또 몇 개를 질문하면 병이 답하고 그런 시스템.


너: 일단 아직 평범해.


나: 내가 더 효율적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며 질문 개수를 정하거나 시간을 정하자고 제안을 했어. 인당 3분 동안 질문 하자, 이게 내 첫 제안.


너: 그건 좀 짧은 거 아냐?


나: 그런가.. 질문하고 답하면 개인당 6분인 셈인데 짧은가? 다들 그런 반응이긴 했어. 예를 들어 제안한 거지 뭐. 암튼 그렇게 얘기가 오가다 5분 정도로 할까요 어쩔까요 그렇게 흐지부지 됐고 담에 만나자며 헤어졌어.


너: 그래, 그게 왜.


나: 그다음에 카톡방에 ‘원래대로 시간 제약 없이 할 생각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왔어. 바쁠 땐 먼저 나가는 걸로 하자, 그런 말도 덧붙여서 좀 길게. 나는 방금까지 같이 얘기하던 걸 왜 갑자기 혼자 결정하나 싶었고 답장을 보냈지. 그룹 스터디인데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건 별로다, 같이 얘기해 보자 이렇게.


너: 그래, 그랬더니.


나: 일방적이라니 당황스럽다는 답이 왔어. 아까 내가 3분을 꺼낸 게 더 부당하다고 생각한대. 스터디 중 잡담은 하면서 왜 단어 시간은 조정하냐는 게 불만의 요지였던 거 같아. 나도 내 의도를 설명했지. 그 당시에 그분은 3분에 꽂힌 것 같고 나는 의사결정 방식에 꽂혀서 서로에게 조금도 설명되지 않는 메시지를 마구 주고받았어. 근데 그 말들 중에 그녀가 스터디 시간에 한 내 제안이 너무 서운했다는 거야.


너: 그때도 그렇게 말했어?


나: 아니. 그게 놀란 지점인데, 나는 그녀가 그런 서운한 감정을 겪는 줄 정말 몰랐어. 참고로 나는 학창 시절 때부터 단어를 잘 외우지도 않았고 외운 들 막상 써야 되는 상황에서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나서 단어공부에 회의적인데... 내가 단어 시간을 두 번째 걸고넘어졌거든, 아마 그녀는 그게 신경 쓰였었나 봐. 게다가 그녀는 단어 공부를 하는 게 그 스터디 시간 중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고. 그래서 내가 3분을 얘기하니까 너무 말이 안 되니 5분으로 늘려서라도 받아주려고 했고, 그때도 내가 3분이 짧다고요? 또 굳이 한마디를 했는데(나는 너무 미안하게 기억이 안 나.. 근데 아마 진짜 짧은가 생각해보고 있었을 거야, 90초면 10개는 주고받는 거 아닌가 이러면서?) 그게 비아냥거리는 걸로 들렸다는 거야.


너: 오메나, 그 순간에 여기저기 생채기를..


나: 그렇지. 그 상황에서 아마도 화가 너무 많이 났는지 표현을 못했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 메시지에 감정이 담겼고 굳이 내가 또 걸고넘어진 거지.


너: 그럼 애초에 왜 네 제안을 받아줘?


나: 그게 또 놀란 지점이야. 내가 뭐라고? 나는.. 진짜로 크게 생각하지 않고 던진 거거든. 난 그동안 회의할 때 항상 뭐라도 안을 꺼냈어야 했었고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어. 나도 반복하는 거 보면 그게 여전히 맘에 안 드나 보지, 근데 불만을 가지면 안 되나? 내가 저주를 퍼붓거나 욕을 한 것도 아니 나도 그 스터디를 계속 참여하고 싶은 맘으로 제안한 거고 말이야. 근데 그녀는 아마 내가 불만해결을 못하면 당장 나갈까 봐 불안했던 게 아닐까 싶어. 그러니까 맞춰주려고 한 거겠지.


너: 나 역시 회의를 물 마시듯 하는 회의주의자로서 말이야.. 온갖 말들이 오가는 회의를 하루 종일 해도 감정을 담지는 않아. 물론 격양될 때도 있는데 내 감정을 그렇게까지 담아서 일을 하면 오래 못하니까. 일이 뭐라고 나를 갉아.


나: 생각해 보니 처음 단어시간 얘기를 꺼냈을 때에도 감정선이 비슷했는데 그때도 내가 별생각 없이 하나 던진 옵션이 주제가 돼버린 거야, 그건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괜찮고 그런? 나는.. 다들 옵션을 냈으면 좋겠는 맘뿐이었고 내 옵션에 무게가 왜 실린 건지 여전히 모르겠어. 뭔가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이상한 권력이 생기는 것 같은 상황이었어.


너: 이상한 눈치 보겠네 서로.


나: 그분은 내가 이번에 또 그런다고 생각해서 화가 확 오른 듯 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견을 내거나 반박을 하는 걸 조심하는 게 가까운 사이에서 주로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어. 친구를 잃을까 봐, 부모나 애인을 잃을까 봐 아닥하고 맞춰주려고 하는. 우리는 다 닉네임을 쓰고 카메라도 안 켜서 찐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야. 카톡방을 나오면 다시 찾지도 못하는 그런 관계지. 그런데 나에게 그녀가 그런 감정소모가 생긴 게 넘 마음이 안 좋았어. 그리고 아마도 일상 속에서 많이들 그런 감정을 겪을 게 뻔해서 그것도 속상했어.


너: 그 감정을 겪지 않으려면.. 결국 다 입 다물고 참아야 하나.


나: 내가 불만을 키우다 표현하지 않고 스터디를 떠나면.. 그게 더 나은 상황이었을까? 아마 그녀는 잡담하는 것도 내심 불만이었는데 참고 있었던 거 같아, 말했으면 좋았을걸. 그 잡담 안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을 텐데. 말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그 안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거나 아니면..


너: 내가 하는 말이 공격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설득할 자신이 없거나..


나: 바로 그거, 우리가 자주 얘기하던 거지. 그니까 내가 꺼낸 3분에 그녀는 공격을 당한 거였어. 나는 공격한 줄도 몰랐던 거고.


너: 비슷한 사례가 너무 많이 떠오른다야.


나: 그녀가 상처받는 걸 그리고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에 감정을 소모하는가 싶어서 맘이 너무 안 좋았어. 그녀가 상처받는 만큼 상처 준(?) 내가 즐거운 것도 아니고 말이야. 예상치 못한 투닥거림에 기분은 별로였지만 서로 사과하면서 마무리는 됐는데 아마 그녀는 앞으로 내가 더 신경 쓰이겠지. 홈..


너: 사람들이 상처받고 사과하고 위로하고 그런 게 엄청 건강한 사이클인 것 같지는 않아. 애초에 받지 않아도 되는 상처는 받지 않도록 강했으면!


둘째에게 감정 괴물 책을 읽어줬거든. 주된 얘기는 사람의 감정이 몽글몽글 생겨나면 여러 색이 섞여서 복잡해 보이지만 그걸 차근차근 잘 구분해서 정리해야 한다는 거였어. 그 책을 듣던 아이가 자기는 요즘에 노란색이 가장 많다는 거야. 참고로 노란색은 슬픔이야.


나: 오, 그렇게 말을 해?


너: 응 그래서 나는 내심 놀랐지만 안 놀란 척 물었지, 슬픈 상황이 뭔지. 엄마가 부당한 요구를 하면 슬프다는 거야.


나: 그렇게 말했다고?


너: 어! 장난 아냐. 그래서 그 부당한 요구가 뭐냐 그랬더니 자기랑 엄마는 같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데 장난감을 자기 보고 치우라고 하는 상황이래. 그래서 자기가 불만을 얘기하면 엄마는 '그럼 네가 저녁식사를 준비할 테야?'이런다는 거야.


나: ㅎㅎㅎㅎㅎ 웃어서 미안, 모.


너: 나 너무 그래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이래. 아닌 상황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를 때, 그리고 말이 잘릴 때 슬프대.


나: 어머나, 그런 감정이 슬프구나. 그리고?


너: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을 때 슬프대.


나: 거 참 표현 정확하게 한다 야.


너: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아마도.. 나 포함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 귀엽다는 이유로 맥락이랑 상관없이 갑자기 미소도 짓고 웃고 표정을 크게 하잖아? 아이는 자기가 중심이다 보니까 자기의 어떤 행동이 웃음을 유발했다고 생각하는데 이유가 딱히 없는 거지. 그러니까 내 옷을 비웃는다, 내가 방금 말한 걸 비웃는다, 내가 걷는 걸 보고 웃는다 이런 결론으로 넘어가는 거 같더라고.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도 순간순간 그 상황을 겪는 감정이 부정적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니, 요즘 귀여운 상황에서도 웃참챌하느라 힘들어.


나: 아이고야 그렇구나. 사고가 발달하면서 전후 인과 이런 관계가 한참 생기는 중인가.


너: 응 그리고 내가 무표정하면 엄마 슬픈 것 같다며 그러면 안 된다고 웃으래, 모. 내가.. 하루 24시간을.. 아마도 그중 23.5시간은 무표정일 텐데.. 머릿속에서는 정말 딴생각하고 있을 텐데.. 웃으면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나: 나도 진짜 화났냐는 얘기를 많이 듣던 사람이라 마음이 쓰리다 쓰려. 그래서 지금도 표정을 밝게 하려고 애쓰게 돼.


너: 교환학생 가서 처음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할 때 한 외국인 친구가 얘기 도중에 좀 정색하면서 나보고 '너는 왜 자꾸 웃냐'는 거야. 그때 영어도 편하지 않고 또 k-한국인으로서 스몰톡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면 듣는 위주로 참여했던 거 같아. 나는 나름 또 분위기를 잘 타려고 웃었겠지? 그런데 거기에서 그 웃음이라는 게 원활류는커녕 오해를 만들어냈어. 아직도 기억난다니까.


나: 왜 사람들이 '기쁨 3%', '슬픔, 분노, 화 97%' 이렇게 두 가지 위주로 감정을 해석하는 걸까? 사실 대부분의 감정은 중간 '별생각 없음, 별 감정 없음 80%' 스펙트럼 안에 있을 텐데 말이야.


너: 자기중심이라 그런가? 그래서, 그냥 던지는 말에도 '불만이다! 관두겠다! 짜증 난다! 나를 싫어한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나?


나: 그럼.. 말 던지지 마? 모. 그래야 할 이유.. 못 찾겠어!


너: 다음 에피소드는 뭐야.


나: 아! 거의 매일 숙제를 내는 한 학생이 있어. 성적이 잘 안 나와서 하긴 하는데 사실 얼마나 하기 싫겠어. 인터넷에서 학교 선생님들이 만드는 연습문제나 시험문제를 검색해서 그걸 내는데, 하루는 그 아이가.. 답을 베꼈던 거 같아. 나는 200% 확신하는데 이유는, 잘못된 인터넷 답을 그 아이가 풀이 과정부터 그대로 다 썼더라고, 몇 문제를..


너: 아이고야, 그래서.


나: 그래서 학생 어머님께 메시지를 남겼어 통화가능하냐고. 어머님 반응에 시간이 걸렸고, 그날도 나는 숙제를 낸 상태였고 나는 학생에게 내가 이걸 인지하고 있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바로 메시지를 보냈어. 인터넷에서 답 베끼냐고.


너: 아니라고 하겠지.


나: 그렇지, 그래도 직설적으로 말해서 애를 당황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 역시 학생은 ‘인터넷에 답이 있는 지도 몰랐어요’ 그런 답을 했고 나는 절대 베끼지 말라고 했어. 숙제 미뤄달라면 미뤄주고 틀린 것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이렇게 신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지.


너: 아이가 곤란했겠네.


나: 그러고 나서 어머님이랑 연락이 돼서 상황을 설명했지. 그랬더니 이 어머님이 나한테 ‘선생님이 혼을 단단히 내주라’는 거야, 선생님은 좋은 말로만 하시잖아요 그러면서.


너: 음.. 그래, 그래서?


나: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정말 내가 왜 혼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니까 그게 내 역할 속에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됐어. 애초에 그 숙제가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이고(나도 그게 내내 불편한 중이었고), 숙제를 베낀 게 잘못됐다는 걸 얘기해야 한다는, 딱 거기까지 알겠거든.


너: 다들 선생님에게 그런 걸 바라잖아.


나: 나는 내 역할을 학생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설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성적을 올려주는 사람이라거나 학생 공부습관을 바꿔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 물론 그런 결과를 대놓고 바라, 그건 공부를 하는 중에 바라는 거지 진짜 시험 결과에 연연하지는 않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사실 학생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커지고 (당연히) 내 맘대로 안되니 애한테 짜증을 내면서 '잘못'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게 돼. 성적이 안 나오니 잘못한 거야, 내 말을 안 듣는 건 잘못한 거야, 나를 짜증 나게 하다니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런.


너: 그래.


나: 이상적인 말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억지로 해야 하는 공부가 무슨 의미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거든.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하기를 싫어한다면 사실 공부한테 책임을 묻고 공부에 괴롭지 않아도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지. 암튼 그래서 어머님께 내가 아이를 혼내고 눈치 보는 관계가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 말하며 통화는 마무리했는데 많은 어머님들이 나에게 그런 걸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숨 막혀서 순간적으로 막 다 관두고 싶었어.


너: 대부분의 어른들이 훈육의 범위 안에 공부를 포함시키는 게 너무 아이러니해 정말. 진짜 모르겠다. 나도 아마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재촉하고 해결하려고 하겠지. 마치 어떻게든 성적을 올리는 게 '선'인 것처럼.. 너 진짜 그때 나 말려야 해.


나: ㅎㅎㅎ 막상 자식 없는 이상주의자 수학선생님 말을 네가 참 듣겠다! 현실 모르는 소리 한다고 나 안 만나는 거 아냐?


너: 미래의 나야 진짜 너 진짜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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