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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May 24. 2023

더 좋아하는 게 나타나지 않으면 벗어나려 하지 않아

그리고 더 좋아하는 건 도무지 나타나지 않지

나: 언니랑 엄마에게 선물을 할 때 큰 차이가 있어. 언니는 소비를 잘하지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언니가 필요한 걸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만족감이 높아. 근데 엄마는 전문 소비인이라서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르는 사람이니까 말로 설명은 잘 안되지만 여러 가지 요소들을 버무려서 원하는 걸 찾아내는지라 내가 찾은 걸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더라고.


너: 선물하는 건 쉽지 않은 거 같아. 게다가 넌 상대가 꼭 쓸 물건을 주고 싶어 하잖아.


나: 나랑 남편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야. 나는 뼛속까지 실용적인 사람이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려고 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어차피 안쓸 거 뻔하다,는 마음이 들면 구매하지 않을 이유로 충분하다니까. 그런데 남편은 무언가를 가진다는 게.. 가진다는 거더라고.


너: 오..?


나: 초반에는 그게 스트레스였어. 사놓고 쓰지 않는다는 건 나한테는 낭비로 해석되니까 남편이 쓸데없이 낭비하는 걸로 보였던 거야. 그래서 같이 쇼핑하러 가면 남편은 신나는데 나는 사놓고 안 쓸 거면서,라는 맘에 심드렁하게 되고 그런다고 안 사는 건 아니지만 남편도 재미가 덜하고 이상한 신경전이 생기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남편은 가지고 싶은 걸 소유하는 그 자체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이제는 진짜로 가만히 있음, 모. 가끔가다가 ‘너 이거 한 댓 개 있지 않냐’는 정도의 진심이 담긴 코멘트를 달긴 하지만.


너: 사람이 이렇게 달라. 네 남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분명한 사람이더라.


나: 맞아. 울 엄마랑 마찬가지로 이걸 좋아하겠다는 예측이 가능한 사람은 아냐. 내 눈에는 고만고만한 거 같은데, 내가 ‘이거?’ 물어보면 또 그건 아니래. 아마 자기가 좋아하는 걸 직접 고르는 거까지가 그들 소비의 완성단계인 거 같아. 내가 골랐던 그 아이템을 자기가 직접 먼저 봤으면 좋아했을 수도 있어.


너: 인간이란!


나: 남편은...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해서 채워 넣는 인생을 사는 거 같아. 이제 와서 보니 그런 인생이 된 것일 수도 아니면 이제야 그런 인생이 된 것일 수도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웬만하면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는 인생처럼 보여. 나는 호불호 판단보다 해야 하는 것들로 채워온 인생인 거 같거든. 좋아하는 게 뭔지 분명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살아온 방식이 그렇기도 하고.


너: 더 얘기해 봐.


나: 더 좋아하는 게 나타나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더라도 벗어나는 선택을 하지 않아. 그리고 더 좋아하는 건 도무지 나타나지 않지.


너: 고등학교 때까지는 의무 교육이니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전 과목 공부를 해야 하잖아. 그런데 그 이후에도 ‘억지로, 버티는’ 모범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던 거 같아.


나: 수학공부를 억지로 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런 게 불편해. 억지로 하다가 잘 해내면 잘 해내는 대로 남은 인생이 이상해지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또 안타깝지. 그러다 좋아하게 되는 건 완전 다른 문제고.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이 혹은 필요로 하는 학생이 수학공부 하는 건 너무 발 벗고 도와주고 싶지, 발을 왜 벗는지는 모르겠지만. 참고로 나는 절대 그런 걸로 학생을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그러지 않아! 모.


너: 그렇게 어른이 된다는 그 말도 참 이상해. 태어나서 20년을 어른이 될 준비를 하면서 싫은 것들을 버텨내라고 하고, 그러다 원래 싫은 걸 하면서 사는 게 어른의 인생이라고 하고 말이야.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단순하게 좋다, 싫다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건 인정. 그런데 굳이 싫은 걸 버티는 것만 어른의 인생에 언급되는 거 같아.


나: 자주 학생들에게 ‘지금보다 덜 빡쎈 날은 앞으로 네 인생에 없을 거다’라는 말을 하거든. 물론 학생들이 가장 힘든 순간에 그런 얘기들을 주로 해, 왜냐면 그럴 때 숙제를 못하는 상황이 생기니까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서 공부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해서. 써놓고 보니 되게 별로인 말이네.


졸업한 학생을 만났는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하는 게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피곤하고 짜증 나는데 할 게 너어무 많으니 울 시간이 없어서 울면서 다음 과제를 하거나 우는 걸 미뤄야 했으니까요. 저희끼리 하는 말로 ’ 이러다 진짜 죽겠다, 하지만 이 숙제가 먼저다.‘ 그랬다니까요. 지금도 그 이상의 강도로 매일이 돌아가는데 이제 원래 그런가 보다 싶어요.’ 그러더라고.


너: 아이를 키우는 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말 너무너무 빡쎄. 자주 드는 생각이 ‘모성애 개나 줘’라니까. 너무 힘드니까 온 사회가 적극적으로 최면을 거는 거 같아. ‘아이는 존재 자체로 사랑이야, 대단한 사랑을 아이에게 주어야 해, 짜증이 난다면 네 사랑이 모자라서 그래, 아빠 말고 엄마만 할 수 있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싶지만 아이랑 상관없이 일단 내 몸이 지치는 것도 사실이라 어쩔 때는 아이를 사랑하는 걸 과제처럼 해내야만 해. 뭐 거기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걸 숙제처럼 하게 만들고 언제나 내 사랑이 모자라다는 부담이나 죄책감을 심어주는 건 진짜 불편해.


..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인생을 사는 건 그냥 그 자체로 에너지소모가 너무 큰 것 같아.


나: 나의 억지 태도 중 하나가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이라 내가 양을 조절할 수 없는 외식을 부담스러워하거든. 남편은 내가 부정적인 이유로 나 자신을 굳이 억지로 압박하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되니까 내가 음식을 남기지 않으면서 분명 어느 한쪽으로 만족감을 느낀다고 생각해. 음식을 남기는 거 vs. 억지로 먹는 거 둘 다 나쁜 거라면 굳이 왜 나를 괴롭히는 선택을 하나 싶은 거 같아, 그게 덜 나쁜 것도 아닌데. 그 상황에서 사실 나는 남편이 도와주길 바라. 그러니까 그도 억지로 먹으면서 나의 불행에 동참하길 바라는 거지. 근데 그걸 표현하면 그의 식사까지 망치게 되니까 그렇게는 못하고 또 신경전이 생겨. 초반에는 몇 번 너도 먹으라고 했었어. 나는 강요였는데 그는 권유라고 생각해서 노땡큐로 마무리 됐지만, 모. ‘내가 좋아서 먹는 줄 아냐’, ‘그럼 왜 먹냐, 그만 먹어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렇구나, 천천히 먹어라' 뭐 이런 이상한 대화가 오가는 거지. 예전에는 그랬고 지금은 그냥 그런 상황에서 나는 (여전히) 먹고 우리는 다른 화제로 얘기해.


너: 나는 지금은 억지로 뭘 하지는 않는 것 같아, 대신 가고 싶은 길을 가기 위해 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지루한 시기를 견디고 있고 그건 괜찮아.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는 거.. 나 역시 잘 못하고 있어. 한다고는 하는데, 좀 더 근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왜 항상 조금 더 버텨야 나오는 일들인가 고민은 된다.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건지,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좋아해 보려고 하는 건지도 좀 헷갈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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