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실은.." "야 나도!"
고해성사는 가톨릭에서 신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의식입니다. 물론 신에게 용서받을 일이 많지 않다면(?) 가끔은 별것 아닌 사소한 일까지 쥐어짜 내야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내 안의 무거운 걸 꺼내놓으면 조금이라도 후련해지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행위를 고백이나 고해로 비유하곤 합니다.
특히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걸 세미컨페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고해성사처럼 심각하고 엄숙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고백.
세미컨페션(semi-confession)이란? 반(半) 고백, 즉 일부만 드러내는 고백. 완전한 고백(confession)처럼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아니라, 살짝 감추거나 애매하게 표현하는 방식.
전통적인 고해성사는 죄의 고백과 용서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고백하는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의 역할이 명확히 나뉘어 있고, ‘너의 죄를 사한다‘는 용서 선언을 통해 의식이 마무리되죠. 반면, 세미컨페션은 심리적인 해소와 공감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친구한테 “나 사실 걔 싫어”라고 말했을 때, 친구가 “헐, 나도”라고 하면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고 정당한 미움처럼 여겨지는 것처럼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너와 나의 세미컨페션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세미컨페션을 합니다. 보통 살짝 떠보는 걸로 시작하죠.
“나 사실은…” (뜨거운 차 한 모금 마시고) “그 영화 재미없더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괜히 눈 한 번 감았다 뜨고) “나 그 사람 별로야.”
이렇게 말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살핍니다. 상대가 “헉,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하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고, 반대로 “뭐? 난 정말 재밌게 봤는데?”라고 하면 슬쩍 말을 돌릴 준비를 하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감정을 정리하기도 하고, 내 생각이 상대에게 용인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도 합니다.
험담도 사실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법입니다. “야, 나 사실 저 사람 좀 별로야…”라고 했을 때, 상대가 “맞아, 나도 그런 생각했어”라고 하면 갑자기 둘 사이에 연대감이 생깁니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에이, 그 사람 되게 좋은데? 너 너무 까칠한 거 아니야?”라고 하면 순식간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죠. 그래서 뒷담은 아무한테나 하지 않고,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한테만 조심스럽게 세미컨페션 형태로 흘려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뒷담은 싫은 내 감정을 나누는 것이지, 대상의 싫은 점을 나누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미컨페션을 왜 하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심리적인 해소입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감정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상대의 반응에서 공감을 확인하면,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별로 안 친한 사람이나 익명의 상대에게 더 편하게 털어놓기도 한다는 겁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깊은 고민을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상대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까 부담 없이 말할 수 있는 거죠.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 너보다 저 친구가 더 편해.” 같은 말은 쉽게 할 수 없죠. 친한 친구일수록 관계에 영향을 미칠까 봐 조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반면, 가벼운 인연에게는 그런 부담이 없습니다. 익명 게시판에 솔직한 글을 남기거나 제가 여기 글을 쓰는 이유도 같을 거예요. 판단받을 위험이 적고, 기대 없이 순수한 공감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가벼운 대화 속에서 “와, 나도 그래” 같은 말 한마디가 의외로 큰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통해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소속감을 확인하며, 자신을 이해받는 경험을 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가벼운 세미컨페션이 깊은 관계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사소한 이야기였지만, 서로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면서 친해지는 경우가 많죠.
결국, 세미컨페션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나 사실은…”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어쩌면 관계를 통해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본능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는 모두 세미컨페션을 할 수 있는 상대가 꼭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한 명보다는 더 많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세미컨페션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고백은 무례하거나, 때로는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미컨페션을 듣는 입장에서도 상대의 이야기를 끊거나, 내 이야기로 주제를 바꿔버리는 등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되지만, 듣기 부담스러울 때에는 적당하고 확실하게 화제를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의 세미컨페션은 단순한 자기 해소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조율해 나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