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탐구생활

크로노스 일상, 카이로스 재미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재미

by 오월

시간이 지나도 문득 떠오르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특별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순간적인 웃음이나 쾌락을 넘어 어떤 활동에 완전히 몰입하여 주변과 시간이 사라진 듯한 순간들. 그때의 공기, 심장 소리,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된 경험일 것입니다.


이런 재미는 흔히 몰입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몰입은 어떤 일이 너무 쉬워도, 너무 어려워도 잘 일어나지 않아요. 적절한 난이도에서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은 감각이 들 때 몰입은 극대화됩니다. 게임을 하든 연구를 하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자신이라는 의식조차 희미해지고 행동과 감각만 남는 순간. 우리는 이런 경험을 반복하고 싶어 합니다.


아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블록을 쌓으며 자신만의 구조를 만들고, 인형 놀이를 통해 이야기를 창조하며, 혼자 흙을 파면서도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 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단순한 감각적 즐거움을 넘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보통 아이들의 재미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어른들이 몰입 속에서 느끼는 재미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재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려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몰입의 재미가 있다면, 그 반대도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아무것도 흥미롭지 않고 무료한 지루한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루함은 새로운 재미를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한때 재미있던 것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고 귀찮아지는 순간도 있지요. 기존의 자극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으면서 무기력해지는 경우입니다. 또, 뭔가를 계속하긴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 깊이 경험하지 못하는 산만한 상태도 있고, 자발성이 없는 강요된 몰입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공부하려던 순간 부모님이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지는 것, 좋아하던 일이 직업이 되면서 예전만큼 즐겁지 않게 느껴지는 것처럼 외부의 강요로 인해 재미가 사라지는 경우입니다.


저는 여행하면 이동의 불편함, 피로, 일정 변경 같은 요소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반면 제 친구는 특정 장소에서의 따뜻한 햇살, 우연히 발견한 서점 문을 여는 순간의 책 냄새 같은 감각적인 순간들을 기억하더라고요. 저에게 여행은 크로노스(Chronos, 연속적인 시간) 경험인 반면, 제 친구에게는 카이로스(Kairos, 특별한 순간) 경험인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경험은 종종 후자의 방식으로 남아, 불연속적인 감각의 조각들로 저장되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조각들을 떠올리며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제 친구는 여행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저는 여행에 그다지 감흥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는 항상 기분 좋은 감정과 연결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 속 예상치 못한 긴장감과 불안 속에서도 묘한 재미를 느낀 경험이 있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몇 시간 동안 쇼츠 영상에 푹 빠져 있다가도 마지막엔 공허함과 피로함만 남는 경우처럼, 재미가 반드시 긍정적인 감정만을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재미들은 중독적이거나 위험할 수도 있지만, 적절한 선에서 경험한다면 감각과 사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진정한 재미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활동에 깊이 몰입해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경험, 안될 것 같았던 걸 해냈을 때의 성취감, 짜릿함, 뿌듯함, 예상하지 못한 즉흥적인 순간에 가지는 시원함,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 가지게 되는 만족감 등은 몰입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일 거예요. 단순히 기분 좋음과는 다른 차원이에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일을 마치고 나서 자주 소모적으로 느끼는 걸 보면 일중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이 아닌 것에도 일중독의 태도로 임하는 것을 보면 현재 제가 알고 있는 재미는 '극도로 성실하게 무언가를 해내는 것'인가 봅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재미를 찾고 싶습니다.


1. 반복할수록 부정적인 감정보다 긍정적인 감정이 더 크게 남는 것

2. 나 외의 어떤 외부 요소도 필수조건이 되지 않을 것

3.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4. 시간이 지나 떠올렸을 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기억으로 남는 것


어린 시절 지냈던 곳으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요. 지금의 생활도 만족스럽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운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진정한 재미는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된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재미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조차 다를 테니까요.


당신도 당신만의 재미를 꼭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찾지 못하더라도, 직접 만들어 가보는 건 어떨까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컨페션이 투머치라면 세미컨페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