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월 Nov 06. 2022

‘나’라는 과일엔 씨가 있고 과육없이 바로 껍질

당연한 반응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면 안 되지

나: 이번에 같이 여행 간 친구는 팬시하고 유니크한 것에 집착해. 자기가 고심해서 선정한 옵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그 외 대안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너: 울 언니는 맛집. 나는 가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입장인데 언니는 몇 시간이든 기다려서 꼭 그 집 시그니처 메뉴를 시켜서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려.


나: 언니는 그걸로 뭘 하는데, 인스타에 올려?


너: 그러지도 않아, 그냥 자기 폰에만 있어. 그 시그니처라는 것도 웃겨. 블로거나 인스타 인플루언서 그런 사람들이 언급한 게 다라니까. 우리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도 무조건 시켜야 돼.


나: 언니 귀여우신대? 재미있다 야.


너: 나랑 둘이면 나만 맞춰주면 되지만 ‘맛집 집착 1인과 그 외 다수’인 가족이 식사를 하러 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여럿이 같이 있을 땐 의견이 강한 사람을 따르게 되니 종종 언니가 가고 싶었던 맛집에 가거든. 그 외 다수의 대표로서 내가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데 몇 시간 기다리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와, 그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는 언니 사이에서 되지도 않는 조율 하느라 너무 피곤해. 그렇게 식당을 들어가면 행복해지냐, 그것도 아니야. 가족들이 지쳐서 뚱한 표정으로 겨우 앉았는데 메뉴 선택권도 없고 음식이 나오면 사진 찍는 거 기다려야 하거든.


나: 그래도 언닌 나중에 폰 사진 보면서 엄청 행복할 거야. 모두가 그럭저럭 행복하지 않은 것보다는 그중 누구라도 확실하게 행복하니 좋잖아. 그냥저냥 식당에 간들, 그 외 다수가 덜 피곤하긴 했겠지만 딱히 더 행복하지도 않았을 거야.


너: 에효, 그래. 그렇게 정리하자.


나: 여행 같이 간 그 친구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물어물어 정보를 얻는대. 우리는 일정이 생기면 ’** 맛집‘을 검색하잖아? 근데 거기는 서로 전화해서 묻는다고 하더라고. ’이번에 어디 여행 가려고 하는데 괜찮은 곳 추천해줘‘ 이렇게.


너: 오, 그거 재미있네


나: 그 친구가 바로 정보통 역할이거든. 그래서 아직 무리 중 아무도 가보지 않은, 하지만 좋아 보이는 어떤 곳에 가보는 게 중요한 거야. 그리고 자기도 친구에게 소개받아 새롭게 알게 된 곳에 직접 가서 검증하는 작업까지 완료해야 하지. 그러면 이제 그 정보는 자기 친구들, 자기 자식 친구들 등등으로 퍼져. 인간 블로그랄까.


너: 울 언니 소개해주자.


나: 그 과정에서 취향을 인정받고, 자기가 좋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기한테 물어보고 그러면 중독되지.


너: 살아있는 좋아요 버튼, 호감 댓글이네. 그거 못 끊지 못 끊어.



그래 가지고, 너의 집착은 무엇인고?


나: 적절한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관계의 의미에 대한 집착? 모든 관계가 의미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고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사람들이 내게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내가 소수의 몇몇 하고만 가까운 관계를 맺고 그 외에는 아예 노관심 이더라고. 관계를 맺어도 나는 여전히 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몇 번 말했지?


너: 그래. 기억난다.


나: 어제 내가 과일로 나와 주변 관계를 형상화해서 설명했잖아. 안에 ‘나’라는 씨가 있는데 과육이 텅 비어있고 바로 껍질이라며.


씨) 내가 있고 나와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과 절친들이 있어. 그들과는 사적인 얘기를 많이 주고받아. 나에 대한 표현을 많이 하고 그들이 하는 얘기도 나에 대한 얘기로 환원해서 받아들여.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점이야.


과육 1) 주로 그룹으로 만나는 친구들. 감정적인 교감을 얼마나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물리적으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고 그 친구들을 응원해. 어떤 친구들이랑은 만나면 노래방도 가고 그러면서 혼자서는 못하는 다른 부분을 해소해.


과육 2) 커뮤니티 아니면 단체 카톡방? 주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공간들이고 나는 익명으로 존재해. 그런 공간의 나는 오프라인에서의 내 모습이랑은 확실히 달라. 현생 오월과 다르게 익명일 때는 내 의견을 강요하기도 하고 키보드 파이팅이 넘쳐.


과육 3) 껍질에 매우 가까운) 나와 같은 성별 연령 그리고 비슷한 성향이나 사회적 경험을 하는,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랑 나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걸까.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 이런 경험이 나에게 어떻게 전달될까.


껍질) 그 외 타인들 모두.


너: 그래 그렇게 얘기했지. 과육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잖아. 과육 3이 껍질이 아니라 과육으로 승진했네.


나: 하하 응응. 지금 나는 연대하지 않는 나를 고민해. 주변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이 내 일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 일은 나에게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흘러가. 잡아보려 해도 안돼. 아마 그런 면에서 그룹 친구들과도 충분히 교감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친구들의 아픔을 들으면 그때는 속상하지만 그게 오래 남지않고 곧 말더라고.


사회인으로서 나의 연대하지 않는 성향에 대해 스스로에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어.


너: 네 말을 들어보니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그런 열망을 가지고 동호회 , 종교 등 비슷한 사람을 직접 찾는 활동을 하는 건가 싶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공감하는 파이가 더 커지길 바라는 게 아닐까?


나: 그런 거 같네. 나는 그동안 내 경험이 늘어나서 감수성이 더 예민해지면 나도 사회에 반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전혀 접점이 없는 타인이더라도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면 진심으로 분노해야 하는 거 같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더라도.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나: 그러니까 나는 나를 중심에 놓고 내가 맺는 관계가 지금보다 단단해지면 사회가 조금은 더 건강해질 거라고 생각해왔고 여전히 그건 내게 중요한 일이야.


지금은 씨와 씨 사이에 관심이 생겼달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혹은 아무 생각이 없든’ 그냥 그 자체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내 마음이 동요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부당한 상황에 있다면 그 상황에 진심으로 화가 나야 맞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어. 지금은 많은 경우에 눈치껏 화나는 척하는 거 같거든.


너: 그러니까, 너 외의 사건들에 무감각한 것에 대한 고민이구나. 지금의 너는 무감각한데, 그렇게 무감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맞니?


나: 맞아. 예시가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기쁨, 슬픔 등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 있고 분노 열망 등 사회에 반응하는 감정이 있잖아. 많은 상황들에서 내가 뭔가를 느껴야지만 사회에 반응하는 감정으로 발전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문제야. ‘내가 슬프기 때문에 분노한다’는 로직이랄까. 하지만 나는 일어나는 사건들에 도무지 감정적으로 반응을 하지 않아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질 못하니 사회에 시큰둥한 거지.


그러다 나 개인이 느끼는 것과 사회에 반응하는 게 별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예를 들어 부정의한 것을 보면 내가 슬프든 말든 부정의하다는 그 자체 때문에 분노해야 맞는 거라는.


너: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침범되는 걸 봤을 때, 마치 뜨거우면 피하고 가려우면 긁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거부하는 반응이 나왔으면 싶은 거구나. 지금은 그 침범되는 상황 안에 네가 있지 않은 경우, 너라는 개인을 대입하면서 그 피해자를 먼저 생각하는데 그 감정이입이 잘 안 되니 아예 상황 자체를 묵과해버리는데, 그게 불편한 거고.


나: 엇 비슷해. 나는 막상 정리가 잘 안 되는데, 너어는 정리 고맙!

매거진의 이전글 ‘잘못 알고 있었네’ 말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