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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Nov 07. 2022

일상에서의 긴장은 어떻게 무너뜨리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방법, 못알랴쥼

나: 얼마 전 ‘같이 있으면 잘해주는데 연락은 잘 안 하는 친구 속마음’이라는 유튜브 짤을 봤어. ‘친구들이랑 만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본인이 먼저 연락하지는 않는다, 자기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사연에 한 유투버가 답하는.


너: 오, 난데?


나: 푸하하하, 나랑 반응이 똑같아! 나도 그래서 클릭했지.


너: 그래 가지고 뭐래?


나: 그 사연자가 아마도 신경이나 사고 과정이 많이 예민한 사람일거래. 친구들 만나면 예민해 보이는 게 싫어서 오히려 무던한 척 연기하는 거고. 예민인에게 무던하다는 연기는 예민한 촉으로 모든 불편한 상황들을 차단하는 거라 같이 있는 친구는 이 사연자랑 있으면 자기한테 다가오는 자극이 없으니 참 편한 거지. 그래서 친구들이 사연자를 자꾸 만나고 싶어 하고 인기가 많아.


이런 사람들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가까워서 감정을 의식하는 모든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거야. 그래서 막상 자기가 그러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그 시간 내내 긴장상태라 에너지 소모가 크고 기가 빨리는 거지. 그래서 굳이 먼저 연락할 엄두가 안나는 거고.


너: 그래서 친구들 만나면 잘 놀다가도 집에 오는 길에는 같이 오고 싶지 않은 건가? 친구들이 좋다 싫다 그런 맘이 아닌 건 확실하거든.


나: 그런 거지. 만나는 동안 열심히 달렸으니 쉬고 싶은 건가 봐.


너: 예민한 사람들을 설명하는 콘텐츠가 참 많잖아? 예민한 사람이 그만큼 많은가, 아니면 사람들이 예민한 사람을 설명하는 콘텐츠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가.


나: 나는 이걸 유튜브로 본 건 아니고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짤로 읽었는데 거기에도 ‘자기랑 똑같다’는 댓글이 천 개가 훨씬 넘게 달렸어. 그게 참 인상적이더라.


너: 오, 예민한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가?


나: 어디서 읽었는데 인류 전체의 2%가 매우 예민 하대. 그 예민함이 종족을 생존에서 구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고. 보이지 않는 위험을 감지하고 머 그런.


너: 매우 예민한 거면 보통인 사람과의 간극이 큰데?


나: 응, 매우 보다는 덜 예민한 게 14% 정도. 그니까 보통 사회에서는 16% 정도가 예민하다고 볼 수 있겠지 통계적으로?


너: 내 주변에는, 회사 다니던 기억 포함해서, 매우 예민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예민한 사람들은 많은 거 같아. 절반까지는 아니고 반의 반 정도?


나: 그게 나도 얘기해보고 싶은 거였어.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한국에는 예민한 사람들이 많은 거 같거든. 진짜 예민한 사람이 많은 걸까 이 한국 사회가 사람들을 예민하게 만드는 걸까. 아무래도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조심하도록 눈치 보게 만드는 사회니까.


요즘 내가 그룹 수다에 관심이 많잖아? 그러면서 그 속에서 사람들이 모두 쿠션만 들고 있다, 이런 표현도 썼지.


너: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도 예민하게 반응한 거겠네. 잽을 날린 사람은 없고 모두가 쿠션으로 막고만 있다고 했지?


나: 맞아. 유튜브에서 말하는 예민은 그걸 넘어서는 거긴 하지만 암튼. 그게 가까운 사이의 모임에서 일어난다는 것도 재미있어. 익명의 커뮤니티에서 나는 훨씬 전투력이 높다고 얘기했잖아? 그 속에서 나는 ‘저건 아니지 않나, 이 말은 꼭 해야 되겠다’는 것뿐이거든. 근데 커뮤니티에서 나를 자극하는 어떤 글들은 친구들이랑 만나는 자리에서 비슷하게 들어본 적이 있기도 해. 그 현장에서도 속으로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을 텐데 분위기를 망칠까 봐 아닥하고 참았다가 인터넷에서 보면 못 참고 터뜨리나?


너: 그거 재미있네. 친구들이랑 있을 때 네가 그 자리에서 ‘마치 커뮤니티에서 하듯’ 반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랬을 때 최최최악의 상황은 뭐지? 막 주먹다짐이 일어나나?


나: 와 내 인생에서 친구랑 주먹다짐을 할 날이 올까? 그거 재미있는 상상이네. 주먹다짐이 일어나기도 전에 나머지들이 우리를 막아서고 그냥 그 그룹이 분열되지 않을까. 분란을 일으킨 나를 카톡방에서 제명하거나 나 빼고 카톡방 다시 파거나?


너: 매우 그럴듯하다. 네가 하려는 말이 뭐였던지 간에 분란을 일으킨 게 더 문제로 여겨질 거야.


나: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그런 상황을 걱정하는 것도 아닌데 나 역시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 해. 뭘까.


너: 우린 예민하게 뭘 차단하는 걸까? 그 자리에서 막 에너지를 써서 막아야 하는 불편함은 뭘까? 그런 논리라면 진짜 저 쿠션을 방향 바꿔가며 가장 탄탄하게 들고 있는 게 예민한 우리라는 거 아냐?


나: 그러니까. 그 정도면 그 모인 순간 자체를 의전하는 거 아니냐? 막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고 다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다가 쿠션을 가장 열심히 들고 있을 우리가, 수다로 친구들끼리 이어지지 않는 걸 고민하는 이 아이러니 어쩔 거야.


너: 완전히 이완된 상태라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 가족들이랑 있어도 긴장, 친구들이랑 있어도 긴장, 아이랑 있을 땐 또 그래서 더 긴장.


나: 나도 그래. 진짜 뭘까.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난 밤에도 잘 못 자고 낮에는 아예 못 자거든. 좋아하는 시리즈를 볼 때도 완전히 몰입하지 않고 다른 걸 병행해. 그니까 시리즈 창을 보면서는 울고 웃으면서 다른 창으로는 서핑을 하든 다른 준비를 하든 하고 있어. 온전히 울고 웃는 순간도 없네.


너: 나는 전에 혼자 거울을 보면서 춤을 춰본 적이 있었거든. ‘춰본 적’이 아니라 ‘추려고 했던 적’이라고나 할까? 그거 조차 안되더라고!


나: 아마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자체 검열을 하고 있을 거야. 최대한 그렇게 안 하려고 쓰자마자 초안 상태로 올리려고 하는데 이 글 보면서 혹시나 내 친구들이 자기를 얘기한다고 생각할까 봐 손가락을 움찔움찔해. 하지만 난 그들과 함께 있는 나를 얘기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발행 버튼을 누르지.


너: 나도 비슷해. 익명으로도 자유롭지 못하다니.


나: 회사에서의 나는 프로젝트를 마치는 순간 잠깐 편안했던 거 같아. 그게 완전 이완상태는 아니겠지만 뭔가 긴장이 누적되고 누적되고 누적되다가 무너지는 잠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너: 그럼 이완되려면 지금보다 더 긴장이 누적돼야 하는 건가? 일할 때의 긴장은 그렇다 치고 그럼 일상에서의 긴장은 어떻게 무너뜨리지?


나: 답 없네 그건. 결국 사연자처럼 연락을 안 하는 소극적 행동뿐인 건가. 그건 이미 하고 있는데!


너: 그러게. 또 억울하네. 발작 버튼 안 눌러도 긴장상태. 이거 괜찮나. 다들 예술로 승화할 거야 어쩔 거야. 이 개인의 예민함을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발산할 수는 없을까.


나: 그러게. 지금은 사회에서 강요된 예민함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약한 존재를 파괴하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어.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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