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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Nov 05. 2022

‘잘못 알고 있었네’ 말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아, 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나: 언젠가는 부모님과 다섯마디 이상의 대화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너: 하.. 지금 대화라고 했니? 누군가가 어떤 것에 의견을 제시했을 때 상대방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 그런 거 말하는 거니 진짜로?


나: ㅎㅎㅎㅎㅎ


너: 이번 여행 가서 같이 식사할 때도 아빠는 어쩜 그렇게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쏙쏙 골라서 말씀하시는지! ‘내가 맞다는 걸 인정하라’는 듯한 강압적인 태도도 그렇고. 그럴 때마다 반박의 의지가 피크를 치는데 말해 뭐해 싶어서 입을 다물고 속은 부글부글.


나: 반박이라도 해보지 왜


너: 안 해봤겠니, 안 해봤겠어? 우린 너무 멀리 있고, 단 한 번도 서로를 자기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 경험이 없단다. 서로 어떤 말을 하고 있어도 그 안에 담긴 뜻은 ’ 너는 틀리고 나는 맞다 ‘야.


몇 번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라고 시도했겠지 나도? 아빠는 이미 언짢은 내색을 보이고 그러면 ‘무탈한’ 가족 모임이 망가지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제는 참다 참다 한마디를 하게 되니까 ‘그게 아니라고요!!’라며 화를 내게 돼!


나: 그런 상황에서는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분노가 솟아오르잖아, 이미 창과 방패를 장착하고 입에서는 파이어 파이어. 주제가 뭐든지 상관도 없어, 서로를 대화 상대로 보질 않는 거라.


너: 그러고 보면 아빠뿐 아니라 나이 차이가 나는 누군가랑, 아니 그 누구와도 면대면으로 의견 교환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나 싶어. 그러니까 ‘오 정말 듣다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런 대화 말이야. ‘잘못 알고 있었네’ 말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그런 대화.


너: 움, 그러니까 정반합, 그런? 가끔은 한창 언쟁을 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둘 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아. 어이없어 진짜,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 거야ㅎㅎㅎ


나: ㅎㅎㅎㅎ 내 말이! 그냥 의견에 반박하는 것뿐인데 사람들이 그걸 ‘나 자체를 무시한다’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잖아. 나도 남편이랑 얘기하다가 나 혼자 감정이 격양되는 경우가 많아. 남편은 그냥 말한 건데도 내 기분이 상해서 ’왜 저렇게 말하지? 알지도 못하면서? 지가 뭔데?‘ 막 이래.


예를 들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있어. 선거에서 우리가 예상한 만큼 지지를 받지 못했을 때 남편이랑 ‘대표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냐 -안 물러난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도 정당인데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 -다 같이 준비하고 다 같이 책임진다 -그건 아무도 책임 안진 다는 거 아니냐 -그렇대도!’ 이런 대화를 했다면 나는 열받아서 씩씩거리면서 이미 위기 상황이야, 모. 누가 보면 내가 대표인 줄 알겠어. 같은 상황에서 남편은 대화 잘했다고 생각하더라고. 그래서 대화를 마치면 남편은 대화 상황이 마무리되는데 나는 아직 열받아 있는 거지. 뭐에 열받은 걸까 대체. 질문에? 그건 아닌 거 같거든. 질문을 받았다는 자체에 열받은 거 같아!


너: ㅎㅎㅎㅎ 맞아. 그래서 그냥 가벼운 반박을 던지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이 막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잖아. 잽 날릴 생각도 아니었고 그냥 주머니에서 손 꺼내려고 움찔한 것뿐인데 마치 폭력배 저지하듯 모두가 합심으로 막지.


나: 진짜 그런다니까. 정말 막아야 하는 말은 그 반박 의견이 나오기 전에 나왔던 말인 경우가 더 많은데.


너: 얼마 전 모임에서 친구가 ‘자기가 너무너무너무너무 바빴을 때 자기 남편이 살림을 했고, 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청소 빨래 등등을 하게 해서 너무 미안하더라’,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미안할 거 까지야~ 같이하는 거지, 남편만 안 해봤나, 나도 결혼 전에 한 번도 안 해봤는데?’라고 했거든.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갑자기 다들 나를 말리더라니까.


나: 어라, 왜? 내가 너를 수십 년 알고 있는데 네가 정색하면서 말했을 것도 아닌 건 뻔한데.


너: 그렇지.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건 내 친구잖아. 내가 한 말이 오히려 친구를 지지한 거 아닌가? 난 아직도 왜 다들 날 말렸는지 모르겠어. 오히려 다들 나처럼 반응해야 ‘서로를 지지하는’ 모임의 목적에 더 맞는 거 아냐? 게다가 나를 말릴 때도 ‘너는 뭘 그렇게 말하냐’, ‘그러지 마라’ 도 아니고, 그냥 처음 얘기한 친구한테 ‘하하하하하 네가 말을 참 이쁘게 하네’ 그런 식으로 어물쩡 화제를 넘기더라고. 칼 든 사람도 없는데 그냥 모두가 두꺼운 쿠션만 들고 있어.


나: 다들 공감 강박에 걸렸나 봐. 공감을 하고 공감을 받아야 하고- 그래 뭐, 그렇다 쳐. 하지만 공감만 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가볍게 투닥거리는 것도 못하는 관계 투성이야. 투닥거리다간 그 결말은 절교야!


너: 그걸 가혹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정도의 관계는 절교가 더 나은 걸까.


나: 근데 너무 많은 관계가 저렇다면? 가족, 부부, 절친, 연인 그런 정말 가까운 사이에서도 투닥거리는 거 겁나서 한쪽 혹은 양쪽이 감정을 억누르는 경우가 정말 많을 거 같지 않은가?


너: 그럴 수 있어. 그리고 ‘져준다’, ‘피한다’ 이렇게 끝나는 상황도 많잖아, 서로 달랐던 의견이 합치하는 경험- 정말 기억에 없다 그러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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