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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Nov 10. 2022

옆에 내가 있다는 것도 알리면서 상대를 주어로 두려면

제가 여기 제 자리에서 제 걱정을 해도 될까요

나: 언니는 증권회사에서 기업 대상 영업을 하고 있는데 금융 시장이 완전 얼어있는 상태라 요즘 많이 힘들거든. 고객사는 투자한 돈을 돌려달라는데 회사 운영팀에서는 해당 상품에 묶인 주식 채권 등이 팔리지 않아서 해지가 안된다 하니 그 사이에 아주 꽉 끼어 있어.


너: 아이고, 영업들만 죽어나겠네.


나: 매번 금융 위기 때마다 영업사원만 방패로 내세우고 뒤에 숨어있는 회사, 너무 별로야. 암튼 계속 얘기해보면,


금융 상품은 운영사가 보통 따로 있어서 언니네 회사는 브로커 역할 위주거든. 꼭 그 회사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고객과의 관계가 얼마나 위태하겠어. 그리고 언니가 뭐 고객사 사장이랑 만나는 것도 아니고 자금운영팀 직원이랑 맺는 관계가 다인데 그 직원도 얼마나 쪼이고 있겠냐고. 좋은 얘기가 오갈 리 없지.


힘들게 유지해온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으니까 최대한 원금 손실도 안됐으면 좋겠고 돈도 어서 돌려주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애만 타는 거지. 새로운 고객 유치도 너무 어려운 시기이다 보니 말 그대로 불가능한 걸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연말이고 승진도 다가오고.


너: 어머나, 진짜 회사 가고 싶지 않겠다.


나: 언니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불가능한 일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 ’회사와 자신을 분리해라‘ 뭐 이런 뻔한 얘기나 하는 거지. 쓰고 보니 스트레스받으면 안 된다, 는 뭐니.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도 아니고ㅎㅎㅎ 아무튼.


너: 그래. 참 답도 없고 무력하겠다 상황이.


나: 하루는 언니가 ‘요즘 정말 죽겠다’ 이러는데 너무 불안한 거야, 그 정도로 말한 적은 없었거든. 금융 위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영업사원들 사례만 자꾸 떠오르고, 건넌 지인이 그런 적도 있기도 하고. 그래서 요즘 내가 마음이 불안 불안해서 자꾸 언니 관심 분산시키려고 웃긴 거 보내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니 신경 쓰이게 하지 마시라고 막 그래, 모.


너: 그래, 옆에서 보는 가족들도 맘이 안 좋겠다.


나: 언니와 나, 아니면 언니와 다른 가족과의 관계 말고 언니의 상황이 직접적인 원인이 돼서 내 맘이 불편한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 이번에 불편한 내 맘을 들여다보니 내가 너무 나 위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 언니가 속상하고 맘쓰는 게 내 맘이 아프고, 내가 언니를 잃을까 봐 두렵고.


너: 그게 왜, 자연스러운 감정 같은데?


나: 분명 언니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나 혼자 저 멀리.. 언니는 없고 나랑 나의 불안만 있더라고. 이게 공감이랑은 다른데, 언니의 속상함 자체로 속상하기도 하지만 내가 언니를 잃을까 봐 내가 불안하고 내가 예민한 게 훨씬 더 커져버렸어.


너: 네가 그때 과일로 형상화한 너와 주변인에서 언니는 너와 가장 가까운 씨 부분이잖아, 그래서 더 그런 게 아닐까. 나도 가족일에는 비슷할 거 같거든.


나: 그렇게 가까우니까 더 언니의 속상함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달까.


내가 그동안 열심히 신호를 보냈던 건지 언니는 나의 예민함에 예민해. 그래서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정말 못 참겠는 극적인 순간까지 가지 않으면 내가 걱정할까 봐 나한테 얘기를 잘 안 해. 이상하잖아, 내가 속상할까 봐 얘기를 못하는 언니도, 언니 회사일에 굳이 불안함을 못 숨기는 나도.


이 상황이라면 언니가 속상하다는 것만 감추면 내 불안을 없앨 수 있는 거야. 당사자의 불안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당사자도 아닌 내 불안 때문에 찐 당사자는 괜찮은 척하는 거지. 이미 많은 순간들에 언니는 속으로 삭이고 난 언니가 그냥 잘 지내는 줄 알았을 거야.


너: 내가 가족들한테 큰일도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하거나 정보를 차단하는 거랑 비슷하네.


나: 그렇지. 잔소리 듣기 싫어서라고 하지만 가족들이 걱정하는 맘이 신경 쓰여서 그렇잖아.


너: 맞아. 내가 걱정거리가 됐다는 게 별로이기도 하고, 가족이 속상한 거 자체가 싫기도 하고.


나: 결혼 전에 남편을 가족에게 처음 말하는 자리에 대해 토로한 거 기억나? 어느 순간 당사자인 나는 온데간데없고 다른 구성원들의 감정만 왜곡되어 남았더라며. 그 상황이 되니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처음으로 직면하게 됐어.


너: 가족일 때 특히 그 사람 자체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걸 굳이 자기 걸로 가져와서 재해석하는 경향이 강한 거 같아.


나: 내가 불만이라고 떠들어댔던 바로 그 성향을 내가 너무 강하게 보이고 있어서 당황스러워. 지금 언니의 상황에 어떻게 거리를 유지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은 ‘내가 언니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 걱정하게 하지 마라‘ 잖아, 완전 내입장. 언니 옆에 내가 있다는 것도 알리면서 언니를 주어로 두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속으로 불안하든 말든 ‘아이고 그렇구나’ 그러고 말아? 움.. 하지만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걸. 지금보다 더 드라이하게 말해? 카톡인데 뭘 어떻게 더 드라이하게 해.


너: 음.. 언니는 고민하게 두고 너는 너의 삶을 사는 것?


나: 지금도 불안이 내 일상을 망가뜨리는 건 아냐. 내 불안이 언니를 ‘평소처럼 부담스럽게‘ 할 거라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거 같아.


너: 언니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이 상황을 헤쳐나가는 걸 묵묵히 지켜보면 되지 않을까. 언니는 네 생각보다 너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 그리고 아마 언니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서 얘기하지 않은 순간들이 더 많았을 거야.


나: 그래, 그럴지도 몰라 진짜.


너: 사람들이 조금 힘들 때에도, 가까운 사람에게 좀 더 가볍고 쉽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오늘 아침에 토스트 먹었어, 그런 정도의 일상처럼 말이야. 징징댄다, 투정 부린다 말고 다른 표현은 없나? 힘든 거 말한다는 표현들이 다 별로다 그렇지.


나: 듣는 사람도 ‘힘 빠지게 왜 그러냐’ 말고, ‘어쩌라고‘ 하지 말고, 해결책 제시할 부담 가지지 말고,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말고, 어설픈 조언 하지 말고 가볍게 그렇구나라며 넘기면 좋을 텐데. 나한테 필요한 말이다 이건.


너: 맞는 예시 인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교실에서 한 친구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애들이 놀라서 소리 지르고 몇몇은 울고 호들갑을 떨었지. 그때 담임이 '그 친구는 쓰러져 있어서 자기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너희가 그렇게 반응하면 자기가 지금 심각하다고 생각해서 더 겁날 거다‘ 라고 했고 우리는 조용해졌어. 그리고 나는 그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는 의도적으로 침착하려 해.


... 너의 불안이 언니에게 좋은 건 아닐 거 같아.


나: 의도적 침착..


너: 가까운 사람들에게 계속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살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도 속이게 될 거야.


나: 이슈를 가진 누군가가 있을 때, 그가 중심이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저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 ‘내 곁에서 충분히 걱정해도 된다’, ‘우리가 네 상황을 염려하는 거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자기를 먼저 생각하라‘, ‘우리 때문에 아무 일 없는 척하지는 말라‘ 고 마음을 전하면서 말이야.


너: 너는 너의 불안이나 불만을 겉으로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잖아. 아마 언니에게도 그렇겠지? 언니가 네 불평을 듣기보다 자기의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인지했다면 언니의 힘든 부분을 자유롭게 터놓기가 더 불편할 거야.


나: 오, 나 한참 여기저기서 많이 듣던 얘기야. 그러고 보니 네 말대로 언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 같아. 뭐든지 균형이 깨지는 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네.


내가 언니의 불평을 듣는 것만 고민할 게 아니었어, 나도 언니에게 내 시시콜콜한 일들을 표현하는 것도 연습해야지. 이 인생, 숙제 왜이렇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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