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첫 수업은 여기 시간으로 보통 네시. 학교는 세시쯤 끝나기 때문에 어떤 학생들은 집에 돌아와 숨 돌리자마자 나와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한 시간이나 걸리냐고? 차 타고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그 시간대에는 차가 엄청 많고 막혀서 그나마 학교와 집이 가까운 학생들이 첫 수업 후보자들이다. 그중 어떤 학생들은 학교에 이어 과외까지 다 해치우고 쉬면서 숙제하고 싶어 해서 첫 수업은 그런 학생들과 하게 된다.
더 일찍도 더 늦게도 실례인 것 같아서 보통 약속 시간 1,2분 전에 도착하려 노력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벨을 누르려 문 앞에 섰다. 벨 버튼에 손을 대려고 하는데...
"아아아악!!!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너무나 침착하게) 너 소리 지르지 마, 다른 사람들 들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선생님 스타일에 다들 못 맞추고 있는 건데 그거 다 알면서 어떻게 그래!!!"
"(여전히 너무나 침착하게) 잘 가르친다는 선생님 붙여주고 내 입장에서도 할 만큼 다 했는데 기대한 대로 안 나오면 무슨 생각이 들겠니?"
그렇다, 예상 가능하게도 위부터 학생-어머님-학생-어머님이다. 이 학생은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지라 영어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학생의 대변대로 이 영어 선생님에게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본인의 채점기준이 있어서 이 학생 포함 네이티브들도 다 좋은 성적을 못 받고 괴로워하고 있는 상황이다. 학생들과 부모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돌아오는 설명은 뻔했고, 채점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이 학생은 노래를 참 잘했다, 음 지금도 잘할 테니 잘한다가 맞겠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냐면, 학생 발성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내 귀에 오랜만에 한국인의 샤우팅이 또렷하게 들리니 벨을 누를 수 없었다. 첫 대사의 첫마디인 아아아악, 은 한국에서조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격렬한 샤우팅이었기에 '벨을 눌러 이 용광로 같은 감정의 폭발에 끼어든다'는 옵션은 애초에 없었다. 대비되는 어머님의 침착한 목소리는 어떻고. 엿들은 게 아니라 들리는 걸 들었다.
나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잡고 어머님께 '어머님, 오늘은 수업이 힘든 것 같아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메시지를 남겼다. 내가 있는 지역은 한국인 쌤이 많지 않아서 나도 학생이 많아 바빴고, 대부분 학생은 1주일에 1회 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나의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는 사실 '1주일 뒤에 뵙겠습니다'는 말이겠다.
몇 분 후 전화가 왔다.
"어머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수업을 닥쳐서 취소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취소한 건 정말 무슨 일이 났을 것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고 집 앞에 갔었는데 분위기가 수업을 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어머나, 하하하하하 아니에요~ 아직 계시는 거죠? 저희 끝났어요. 지금 수업할게요!"
끝났다, 는 말을 믿지는 않았다. 아무리 내가 바쁘다고 한 들, 이렇게 수업하는 게 의미 있나 싶었는데 나는 내 고객이 누군지 명확히 아는 편이다. 수업료는, 어머님으로부터 나온다.
"앗 네 어머님 그럼 올라가겠습니다"
주차장에서 차 안에 있던 나는, 다음 수업장소로 옮겨가서 카페를 갈지, 여기 근처 카페에 갔다가 다음 수업 시간에 맞춰 이동을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고객님이 부르셨다.
"아우, 벨을 누르시지~ 죄송해요 선생님. 영울이는 방에 있어요~"
어머님은 전혀 이상한 분이 아니다. 그저 체면을 많이 중시하시는 분이라 내가 그 상황을 아는 게 겸연쩍으셨던 거다. 그래서 전화하면서, 나를 맞이하면서 웃으셨다는 것도 안다. 집에 방문하며 어머님들을 만나면 잠깐이지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똑똑, 나 들어갈게요"
학생과 어머님의 갈등 도중에 수업이 시작되는 건 생각보다 자주 있다. 처음엔 어쩔 줄 모르고 어색했지만 나중엔 그 와중에 숙제 검사도 하고, 진도도 나가고, 시험에 대한 잔소리도 하는 등 해야 할 일을 할 정도로 베테랑(?)이 되었다. 그래도 이번엔 달랐다. 영울이는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눈물방울 하나하나가 그렇게 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영울이와 가까웠다. 나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애착을 크게 가지는 타입인 데다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상대에게는 마음을 활짝 연다. 영울이는 나를 과외쌤으로, 그리고 이모 같은 재질로 잘 따랐고, 내 마음은 영울이에게 열려 있었다.
그렇게 울고 있는 영울이를 보니 숙제를 확인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위에서 말한 '생각보다 자주 있는 상황'은 티격태격 정도다. 이 학생들의 감정이 바다 한가운데의 파도라면 지금 영울이의 분노는 절벽을 치고 부서지는 파도다.
"괜찮아요?"
이건 뭐. 무슨 말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 하는 말이지만 누가 대체 표현 좀 알려주면 좋겠다. 눈앞에서 안 괜찮은데 괜찮냐니,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거야.
"엄마가... 어흐으으으윽... 제가 여태까지 어흐으으크으윽... 다른 거 만점 받아도 잘한다고 한마디도 안 하고 흐으긍크... 그건 당연한 거고 영어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거 다 봤으면서, 그런데도 성적 안 올랐다고 저한테 으허어어어어컥컥컥"
나는 학생의 등을 두드리며 "아이고 많이 속상했겠어요"라고 한다. 이때 절대 어머님을 두둔하거나 욕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나름의 노하우다. 영울이 말로는 어머님이 순간적으로 잘못된 표현을 사용하셨고, 그동안 그래도 '자기 잘못이겠거니, 자기가 더 잘하면 되겠거니'라고 참았던 학생이 폭발한 거다.
해외에서 살아보니 가족 외에 마음을 나누는 확장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 가족 내 문제가 생기면 가끔은 물리적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할머니, 이모, 삼촌, 학교든 학원이든 종교든 맘에 맞는 선생님 등 제삼자의 도움을 받거나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어디든 가려면 부모가 데려다줘야 하고, 도와줄 그들은 여기 없다. 그래서 가족 내 문제가 생겨도 각자 방에서 그냥 분노를 삭이는 게 다다. 그 이후 제대로 관계를 재정비하는가? 그러기는커녕 흐린 눈으로 어물쩡 넘기다가 상처가 더 크고 깊어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대하면서 이모와 친구를 섞은 제3의 어른이 되고 싶다, 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고, 그 고민에 섣부른 조언이나 충고를 하지 않고, 중재하겠다며 상대를 대변하지 않고, 가끔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얘기를 해주는 그런 어른. 아, 그리고 그 얘기를 퍼뜨리지 않는 그런 사람.
내 맘은 그랬지만, 속으로 이 얘기 저 얘기 고르다 막상 별 얘기 못하고 다음 수업 시간이 다가와서 떠났던 거 같다. 순간 그 표현에 깊이 찔린 학생에게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난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는데도 언어영역(현 국어영역)을 그렇게 못했어요' 머 이런 이상한 말이나 했지 뭐. 만약 학생이 '왜 지금 저 말을 한 거지'라고 했다면 잠깐이라도 생각을 바꿔놨으니까 그나마 성공이다. 근데 그러지도 못했다. 대충 저런 맥락 없는 몇 마디를 한 거 같은데 제3의 어른이고 뭐고 실상은 아무 역할도 못한 채 시간이 갔다.
누군가의 상처가 클 때 어떤 맥락으로 다가가야 할까. 그게 왜 상처냐, 왜 그렇게 상처받을 만큼 약하냐, 그 상처 왜 그렇게 크냐. 셋 다 의미 없다. 뭐라고 한들, 이미 아프다. 지금 당장 아프면 상처다, 우선은 아픈 건 아프다고 하자, 부모여도 지금 그 순간만큼은 탓해도 된다,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 머 이런 맥락은 괜찮을까.
가까운 사람은 의도가 어떻든 참으로 날카롭다. 그리고 그때의 그들은 부모로부터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부모가 자기에게 실망할까 봐 너무나 예민하다.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오히려 부모를 공격하고 자기도 상처받는다.
그날 영울이는 방에서 안 나올 거고 밥도 안 먹을 거다. 여기서 원 앤 온니 베프인 엄마랑 며칠을 아무 말 안 할 거고 아빠는 '그만 좀 싸워라. 이놈의 지겨운 집'이라며 불편함을 불평할 거다. 하루 종일 마음이 쓰여 밤에 집에 돌아와 '기분 나아지면 보라'며 웃긴 글 모음 같은 링크를 보낸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지금의 영울이는 대학생이다. 얼마 전 "그땐 왜 그렇게 뾰족했나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그땐 그게 필요했을 거예요.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요"라며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나에게 "쌤, 너무 감사했습니다. 꼭 제가 식사 대접하고 싶어요."라는 메시지도 받았다. 맘이 몽글몽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