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학생이 F일 수가 있다, 없다?

성적

by 오월

화창한 어느 주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메시지가 도착한다.


"선생님, 기현이 수학 F 나왔어요"


기현이 어머님이다. 나는 머리가 하얘져서 바로 메시지를 보낸다.


"기현이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한들, 그게 뭐가 중헌가. 찍혀있는 성적이 F인데. 개별 시험도 아니고 학기중 성적이다. 죄송하다, 고 하니 선생님이 왜 죄송하냐며 어머님은 나를 탓하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너무 놀라서 같이 상의하고 싶었단다.


'한국에 비하면 해외 수학은 쉽다더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한국을 떠난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은 수학만큼은 탑이지'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학업을 시작한다. 다양한 학생을 만나는 나는 저 말들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안다. 애초에 한국 수학을 하지 않을 학생들인데 왜 한국 수학 얘기를 들어야 하며, 한국인을 수학 잘하는 사람들만 모인 집단인 줄 아는 거 인종차별(!)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모든 과목 자체 난이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많은 국제학교에서는 고2, 고3 동안 대학과정을 커버한다. 예를 들면 심리학 개론, 경제학 개론 등 머 이런 내용들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 모든 용어와 맥락을 이해하는 건 언어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어를 문제없이 구사하는 우리도 한국어로 배우는 모든 과목을 잘하지 않으니까. (교양으로 심리학 개론을 들었다가 망한 후 지금까지도 심리학에 마음이 멀다.)


다음 수업 전에 기현이를 만나기로 한다.


기현이가 시험 볼 때 몇 번 "이상하게 수학은 시험지를 받으면 앞이 깜깜해진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긴장하는 건 아니라길래 그것도 긴장일거다, 긴장이 항상 심장이 뛰고 숨이 가쁜 건 아니라고 말해준다. 더 압박 상태에서 준비해보자, 고 나름 이것저것 시도했는데 먹히지 않았나 보다. 내 고등학교 첫 학기 중간고사 때 옆반의 한 아이가 스트레스가 심해 시험지를 받고 글씨를 읽는데 해석이 전혀 안돼서 전과목 시험을 망친 후 학교를 자퇴했다. 그래서 나는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머님과 상의도 하고 상담을 받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유난히 수학 시험에 너무 긴장하던 다른 학생에게는 시험 전 청심환 반 개를 먹으라고 해봤다.)


기현이 시험지를 확인할 땐 황당하게 틀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윗 줄에서 +2였던 게 다음 줄에서 -2나 +12가 된다던지, 문제를 잘못 옮겨 써서 푼다던지 뭐 그런 것들. 그래서 내가 더 어려웠다. 푸는 방법도 맞는데 왜 이렇게 잦은 실수가... 점수가 그렇게 낮은 건 아닌데 다른 학생들 성적이 높아 등수가 낮았나 보다. 아 이놈의 한국 학생들.. 그 반 대부분이 한국 학생들이었고 역설적으로 내 고정관념은 또다시 강화된다.


"속상했겠어요"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이 공부한 게 성적에 드러나길 가장 바라게 된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 라는 걸 학생 때는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기현이는 수학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숙제도 성실하게 해왔고 수업 중 이해도 잘했다. 이 학생도 한국에서 산 기간보다 해외생활이 더 길어 영어가 문제는 아니었다.


내용을 이해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건 내가 도울 수 있지만 시험을 보는 건 학생에, 성적은 채점하는 선생님에 달렸기 때문에 나는 성적을 너무 캐묻지 않는다. "성적은 어떻게 나왔냐"라고 물었을 때 "그냥 뭐.."라고 말하면 "그래도 우리는 계속 가봅시다" 라며 분위기를 전환하곤 했다. 학생들은 자기네가 말하고 싶은 성적이 나오면 묻지 않아도 말한다. 그리고 정말이지 가끔은 선생님들의 채점을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한 번은 그래프 그리는 문제에서 "not pretty"라면서 점수를 깎았다니까.


"우리 어떻게 해볼까요"


나는 단 한 번도 학생들에게 내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면야 좋겠지만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때 여기에 국제 수학을 가르치는 한국 학원이나 한국 수학쌤이 거의 없어서 다른 쌤이랑 해보라는 제안도 어렵다. 다른 국적 쌤들과 수업을 하다가 스타일이 달라서 나와 하는 학생들도 많다. 어떤 쌤들은 설명을 최소화하고 학생들이 직접 원리를 알아가길 바란다(*). Teacher보다 Facilitator랄까. 여기 학교 교육방침도 비슷하다. 그거 따라가려 추가로 받는 수업인지라 설명을 위주로 하는 한국쌤인 내가 그 당시엔 희귀템이었나보다.


"제가 욕심을 낸 거 같아요"


학생의 말에 따르면, 그 전 학년부터 수학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는데 다음 학년 올라갈 때 한국 학생들이 다 extended maths를 들으니 자기도 친구들을 따라 그 반을 지원한 게 잘못이었던 거 같다, 는 거다. '수학 잘하는 한국인' 고정관념에, 한국 학생들이 성적보다 높은 반을 지원해도 코디쌤이 그러라, 고 한단다.


어머님들이 자주 다음 학기 걱정에 전화를 하신다. "우리 애가 하이레벨을 들어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답이 어렵다. 학생의 향후 진로가 높은 수준의 수학이 필요하다면 따라갈 수 없어도 따라가도록 해야 할 거고, 그게 아니라 '한국 학생들은 다 하이레벨을 하니까' 하는 거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린다. 유럽식 IB라는 커리큘럼 기준으로 하이레벨 아니면 스탠더드 레벨인데(무조건 수학은 들어야한다) 스탠더드 레벨 역시 만만치 않고, 개개 과목만큼 전체 성적 관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코디쌤이 학생에게 "넌 진로를 어떻게 생각하니, 앞으로 하이레벨을 들으려 하니? 네가 extended도 잘할 거라 생각하지만 진로를 보니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고, 다른 과목들에 쏟을 에너지도 필요하니까"라고 다르게 생각해볼 여지를 줬다면 좋았을걸. 왜냐면 기현이는 그때 생각하고 있던 진로가 꽤 확고했고, 그 진로는 수학 하이레벨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여기 학생들은 고1 하반기에 고민이 가장 많다. 위에 언급한 대로 고2, 3 때 대학과정을 듣게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진로 방향을 잡아야 해서다. 끝까지 결정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은 결국 이과를 선택한다. 주로 에세이로 서술해야 하는 과목들을 피하려는 목적이 더 클 때가 많다. 이때 기현이도 고1이다(고등학교가 4년 과정인 셈이라 엄밀히는 고등학교 2년 차). 마음이 무겁다.


"반을 내리려고요"


이유가 충분하다면 남은 학기동안 반을 바꿀 수 있었다. 물론, 이유는 충분했다.


반을 바꿔도 나와의 수업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반이 달라도 콘텐츠는 같기 때문에 내가 설명하는 내용이나 난이도도 비슷했고 학생은 여전히 성실했다. 그 이후 기현이는 시험지가 까맣게 보인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볼 땐 두 반의 시험지는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았는데도 작은 실수가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학생은 자신감이 붙었다. 아니지, 자신감이 깎이지 않았다.


결국, 고2, 고3 스탠더드 레벨에서 기현이는 가장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이놈의 한국 학생이란..




* 한 학생이 다른 국적 쌤과 화학 수업하던 얘기를 들려줬는데,


쌤: 자 몇 페이지 펴서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학생: 중얼중얼...

쌤: 그럼 이제 다 이해됐죠?

학생: ????

쌤: 그럼 다시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학생: 중얼중얼...

쌤: 그럼 이번엔 다 이해된 걸로 알고 다음 페이지 읽어보세요..


머 이랬다고 한다. 이런 소문은 금방 퍼지고 '설명을 하는 희귀한 한국쌤'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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