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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Feb 14. 2023

개인이지만 사회 안에 존재하고 싶은데

이제 팔짱을 풀고 서로 손을 잡자

나: 내가 수다라는 아이템을 언급하기 시작하던 즈음에 큰 고민에 빠져있었어.


너: 뭐였지?


나: 코로나 때 온라인 모임이 활발해지면서 평소에 관심 있던 사회 이슈 모임에 나름 열심히 참여했거든.


너: 그래, 기억난다.


나: 관심있는 이슈에 대해 열심히 새로운 인풋을 받는데도 도무지 달라지지 않는 나를 다시 맞닥뜨렸어.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알아간다’, ‘너희들을 지지한다’는 제 3자 태도에서 변하질 않더라고.


너: 네가 몇 번 언급했지. 나는 원격으로 열심히 참여하는 게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어.


나: 참여라는 건 매우 개인의 결심이잖아. 그런 결심이 모여서 사회가 형성되는 건데 나는 결심만 있고 사회까지 합류하질 못해. 몇 번 째인지!


너: 넌 네가 꽤 사회성이 좋다고 생각하잖아. 그 사회성은 뭐야?


나: 성실함과 유연함, 적당한 예민함. 사람들을 만날 때 갈등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써놓고 보니 쿠션 열심히 들고 있는 모범생이네.


너: 그럼 사회에 합류한다는 건 뭔데?


나: 경계의 붕괴 혹은 모호함. 개인의 일은 오롯이 내 일, 사회의 일은 전부 내 밖의 일이라고 선을 분명하게 긋는 나의 태도에 문제제기를 해. 내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고! 내 밖의 일에는 팔짱을 낀 방관자일 뿐이고! 이런 태도. 이해가 되나?


너: 알 것 같기도. 그 모임의 방식이 너와 안 맞았나?


나: 그럴지도 몰라. 그러다 내가 개인에서 사회로 넘어가는 걸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여러 친구들과의 시간이 생각났고, 작고 가까운 그 안에서 조차 나는 개인에서 더 나아가본 적이 없고 친구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내면서 수다라는 아이템이 발굴 짠.


너: 그래, 우리가 더 어릴 때 ‘개인주의자’ 브랜딩이 유행했던 거 기억난다.


나: 맞아, 그게 또 쎄련이었지. 그 이후에도 우리가 말하는 사회라는 건 가족이나 회사뿐이었어. 우리는 그룹챗에서 조차 사회문제를 언급하지 않아.


너: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런 언급이 자주 공해가 돼서 그 챗방을 안 들어가는 이유가 되기도 해. 그래서 오히려 먼 관계에서나 언급하고 진짜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아무 말도 안 하게 되는 듯.


나: 맞아, 그렇네. 너는 요즘 매우 개인적인 줄 알았던 네 고민들이 알고 보니 비슷한 경험을 가진 우리 세대의 고민인 걸 알게 됐다고 했잖아. 그런 아이템과 과정들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작점이 될 것 같아. 그건 아예 우리 얘기이기도 하고.


너: 그래. 모두가 바닥부터 에너지를 쏟는 게 안타까워. 각자에게 맞는 해결책이라는 게 있고 결과도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래도 교집합이 크다는 걸 다들 알면 좋겠다 싶어.


나: 난 사람들이 다양한 얘기를 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자주 봐. 꽤 자주 이해가 안 되는 글을 맞닥뜨리고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야. 커뮤에서 그렇게 다양한 얘기에 의견이 오가고 티격태격하는데 오프 모임은 어째서 뻔한가.


너: 여럿이 진행하는 팟캐를 듣다 보면 사람들이 매우 말하고 싶어서 난리거든. 어느 정도 대본이기도 하겠고 주제가 분명해서 그렇기도 하겠지.


나: 내가 전에 페북에 기사를 공유하는 데 아무도 변하지 않아서 의아했다고 한 적이 있거든, 나 역시 변하지 않았고. 나도 팟캐를 전부터 자주 들었고 여전히 좋아하는데 그걸 들은 다음에 그 주제에 대해 그들의 말을 따라 할 뿐이거나 그마저도 몇 문장 이상 언급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 여전히 의아해. 나한테 일방이라는 건 역시 잘 작동하지 않나 봐.


너: 그렇구나.


나: 내 사회적인 관심을 친구들과 대화하는 건 여전히 상상이 잘 안돼. 나는 내 관심을 친구들과 전혀 나누지 않고 있고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게 고민의 시작.


너: 난 요즘 조립식 관계에 관심이 생겼어.


나: 오 그건 뭐야?


너: 전에는 막연하게 가족이라는 게 내 삶의 형식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선택해서 꾸려왔어.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 근데 인생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홉 글자로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게 실감이 되었지. 내 인생의 큰 부분에 가족이 자리하지만 가족이 내 인생을 지배하는 건 조심스러워.


나: 그래 그래. 진짜 우리 윗 세대만 해도 불행 결혼을 선택할 수는 있었어도 이혼은 옵션에 없던 사람이 많았지.


너: 응. 친구 중 한 명이 아이를 낳고 ‘난 여전히 남편과 나의 관계를 아이보다 더 우선으로 놓을 거야’라고 한 적이 있거든. 아이에 지배되지 않는 선언을 하는 게 신기했어. 나는 그런 선언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하고 구성하는 게 가족만 있는 건 아니다, 정도. 그래서 다른 구성 성분들을 차근차근 찾아볼 거야. 거기에 ‘일’도 있겠지만 그에 또 잠식되는 삶은 아니었으면 좋겠어.


나: 네 고민 좋다. 그 어떤 것에도 너무나 막중하게 지배되지 않으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야, 혹은 무너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무 쉽게 말하나 싶긴 하지만 지금 들었을 때 맘은 그렇네. 많이 찾아보자!


너: 내 팟캐 진행자들이 자신들을 조립식 가족이라고 하면서 도 썼어. 둘 다 결혼하지 않는 걸 선택했지만 혼자 사는 걸 원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서로 잘 맞는 둘이 같이 살기로 결정했어. 법적으로 가족이라는 걸 증명할 순 없어도 다양한 결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런 여러 모습에 사람들의 ‘오답’에 대한 초조함이 줄어들 수 있을 거야.


나: 맞아. 미혼 혹은 비혼이 혼자의 삶인 건 아닌데 그 등치를 깼어. 그런 걸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네 인생 탄탄하게 조립하는 얘기를 들려줘!


너: 딱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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