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인생은 짧고, 책들은 많다

by 허관


나는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성실하게 출근하지만, 월급을 받지 못한다. 월급 문제로 노동청에 신고를 생각한 적도 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나는 도서관 직원이 아니고, 도서관 이용자이기 때문에 신고해도 월급을 받아 낼 수 없다는 걸 도서관에 다니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도서관으로 출근한 지 7년이 넘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중학교와 고등학교 기간을 다 합해도 6년이다. 중고등학교보다 더 오래 다녔다. 회사로 치면 눈치로 하루 정도는 땡땡이칠 수 있는 짬밥이다. 하지만 도서관은 하루도 땡땡이칠 수 없다. 과거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교과서 이외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서른쯤이었다. 서른 살까지 책과 담쌓고 지낸 것이 책을 싫어한다든가, 읽을줄 몰라서도 아니었다. 해미고를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해미고 졸업생이라 책을 멀리 한다니? 생뚱맞다 못해 미꾸라지 용트림하는 소리라고 비웃을지 모르겠다. 허나, 엄현한 사실이다.


지금은 해미고를 시기한 무리의 모함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졋찌만, 한때 세계적인 명문고였다.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해미고를 졸업한 그 누구도 더는 책을 읽지 않았다. 인생살이에 필요한 지식은 모두 해미고에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해미고 졸업생은 더는 배울 게 없어 대학도 가지 않았다. 원조받는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초고속 발전의 원동력은 해미고에서 나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랬던 내가 어쩌다가 도서관의 장서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는지는 비밀이다. 대부분 사람은 비밀 하나쯤은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산다. 그러니, 내 비밀을 궁금해하지 마라. 당신이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처럼 나도 그런 비밀이니까.


현재 지구상에 살아있는 인간은 80억가량이라고 한다. 80억이라니?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숫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인간은 500억 명쯤으로 추산한다. 80억이나 500억이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숫자이기에 도긴개긴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도서관에 가면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나온 이후로 살다 간 500억 명을 만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500억 명을 모두 만날 수 없고, 다 만날 필요도 없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여 삶이 비슷비슷하기에 굳이 모든 사람의 삶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당연히 시대별로 몇 명만 도서관에 있지만, 500억 명이나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나를 봐달라고 아우성친다. 얼마나 환상적인가. 500억 명이 나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니? 그럼, 이상형인 그 사람도 만날 수 있겠네? 당연하다. 도서관에 가면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그 사람을 만나 삶의 조언을 구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도서관에서 심하게 코골고 자는 사람을 기분 나쁘지 않게 깨울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또 찾는다고, 지난 사람들과의 사랑도 해본 사람만 하는 것 같다. 내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도서관에서는 바람둥이여도 그 누가 뭐라 않는다. 플라톤을 열렬히 사랑하다가 비트겐슈타인으로 갈아타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사랑하다 보면 사랑의 결실인 자식이 생긴다. 정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자식이다. 7년 동안 도서관에서 지난 사람들과 지낸 나도 물론 자식을 여럿 낳았다.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모든 자식이 귀하며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해야 하지만, 나도 인간이기에 마음속에는 우열이 있다. 맞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얼떨결에 남극 펭귄 생포 작전에 참여했던 바탈(청소년 소설 남극 펭귄 생포 작전 주인공 이름)이다. 그다음은 갓 엄마 젖을 떼자마자 문 없는 문으로 들어간 무구(문 없는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다.


바탈과 무구를 비롯해 도서관에서 태어난 자식은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수년 동안 내가 가슴에 품어 키웠다. 이들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바탈을 잉태할 때 나는 ‘서은국’, 조정래’, ‘정유정’, 그리고 ‘팀 보일러’ 등과 자주 만났고, 무구를 잉태할 때는 ‘윤대녕’, ‘E.H 카’와 ‘마키아벨리’, 그리고 부처와 사랑에 빠졌었다.


부처와 사랑했다고? 맞다. 나는 부처와도 진한 사랑을 나눴다. 당연히 정신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했기에 무구가 태어난 거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파닥거리고, 허벅지가 불끈거린다.


대부분 자식이 그렇듯이, 도서관에 낳은 자식도 꽤 속 썩였다. 특히, 17살에 남극으로 펭귄을 잡으러 간 바탈이 애간장을 태웠다. 정말 나약하고, 말도 잘 못하는 바탈이 한때는 공화국 영웅 전사였지만, 그릇된 신념과 망상으로 가득한 K1과 함께 그 기나긴 여정을 떠났다. 부모인 나는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했다.


그래도 제대로 삶을 살 것 같지 않던 바탈이 남극 펭귄 생포 작전을 끝내자 어엿한 청년으로 변한 모습에 너무나 뿌듯했다. 바탈의 앞날은 걱정할 필요 없다. 문제는 무구였다. 오대산 속에서 자란 무구는 자신의 탄생 비밀을 알아버린 후 묵언수행 중이다.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태어난 무구였다. 그 많은 업보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물론, 바탈과 무구도 내가 다니는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다. 바탈은 인기가 많아 도서관 서가에 있는 기간보다 외출하는 기간이 더 많다. 무구는 여전히 묵언수행 중이다. 무구를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지만, 나는 믿는다. 언젠가 무구가 자신의 과거를 모두 용서하고, 밝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중생의 마음을 달래줄 거라고.


온갖 꽃들이 난리 치며 욕정으로 활활 타오르던 4월이 지났다. 4월에 잉태한 씨앗을 품은 자연이 씨앗을 키우기 위해 태양을 향해 활짝 손을 벌린 5월의 숲이 싱싱하게 푸르다.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고, 마당가도 푸르다. 이런 날에도 나는 내 마음속에 누군가를 잉태하기 위해 도서관에 출근하여 과거의 누군가와 사랑을 속삭인다. 요즘은 스리랑카 사람인 마이클 온다치와 진한 사랑에 빠졌다.


나의 살아온 삶이 보잘것없으며, 지금의 삶도 꽤 유쾌하진 않다. 나도 한 명의 인간이다. 당연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가 있고, 내가 도서관에서 지난 사람들과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삶 일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50여 년의 삶 중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다만, 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인생은 짧고, 도서관에는 책이 많다는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눈(雪)에서도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