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원 과제로 제출할 단막주인공의 성격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내가 쓰려는 단막 줄거리의 주인공은 어떤 사정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만약 여기서 내가 설정한 주인공이 완벽한 인물이라면 사이코패스나 천재가 등장하는 범죄수사물이 될 것이고 빈틈과 결핍이 있는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신파가 섞인 코믹물이 될 것이다.
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전자의 경우, 인물의 성격을 상상만으로 그리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비슷한 인물을 찾아 가까이에서 관찰해야 하는데 그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굳이 찾고 싶지도 않다. 결국 기존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비슷한 인물 유형들을 분석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그런 드라마들은 대부분 화면이 음침하고 어두워서 낮에는 잘 보이지도 않더라. 뭐가 보여야 분석을 하지.
그리고 완벽한 주인공을 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내가 천재가 아닌데 어찌 천재를 그릴 수 있단 말인가. 드라마 주인공의 지능은 곧 작가의 지능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내 지능으로 천재 범죄자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내 이야기의 주인공은 빈틈과 결핍이 많은 주인공으로 정해졌다. 서글프면서 어설픈 인물. 그래서 인물을 그릴 때 상상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빈틈과 결핍은 나를 포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요소일 테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상황을 겪으며 쌓여온 나름의 빅데이터가 있으니 거기서 충분히 인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캐릭터의 성격이 정해지니 이야기의 장르와 방향도 정해졌다. 나는 그렇게 정해진 인물을 트리트먼트에 입혀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시놉시스라는 뼈대와 트리트먼트라는 이정표를 토대로 살을 붙여가며 정해진 방향으로 이야기를 몰고 갔다. 이야기 안에 큼직한 사건이나 갈등은 대략 구상을 해놓았지만 그 사건들이 개연성 있게 이루어지려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밑밥도 뿌려놔야 하고 중간중간 떡밥도 쑤셔 넣어야 한다.
감정기복자의 탄생
이렇듯 작가란, 씨를 뿌리는 농부도 되었다가 때로는 떡밥을 뿌려 고기를 잡는 낚시꾼도 되었다가 또 배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몰고 가는 선장도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중 하나의 역할이라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걸까? 솔직히 다른건 모르겠고 극본을 쓰면서 엄청난 감정기복자가 된 건 확실한 것 같다.
'나 천재인가 봐'와 '내 글 구려'가 매일 같이 치열하게 싸우며 엎치락뒤치락하고 그에 따라 내 기분도 엎치락뒤치락했다. 쓰레기통과 꽃밭 사이를 왔다갔다하는게 작가 지망생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정기복이 더 심해지는데 이 일을 어쩔 거야. 아. 참고로 꽃밭 시즌은 지났고 지금은 내 글 구려병 기간이다.
나는 내가 쓴 글에 대한 자신과 확신이 없는 상태로계속 극본을 써 내려갔다.그동안 한 번도 내가 쓴 극본을 누구에게 보여준 적도, 피드백을 받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추후 아주 공들인 쓰레기가 될지언정지금은 일단 써야 한다. 그래야 욕이든 칭찬이든 어떤 피드백이라도 받을 것이 아닌가.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여기까지 왔다. 그 한번을 위해 많은 것을 걸었으니.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노트북을 열어 최선을 다해 쓰레기를 다듬고 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