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에는 시간이 앉아 있다

by 봄날의꽃잎


어느 날, 문득 그 골목을 걷게 되었다.

사람도, 집도, 풍경도 많이 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길은 그대로였다.

굽이진 모퉁이며, 오르막 경사며,

아직도 내 발이 기억하는 그 길.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친다.


마당 가득 펼쳐진 이불을 발로 밟던 여름날,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던 대야에 발을 담그고

"아이스케키!" 외치며 웃던 친구들 얼굴이 떠오른다.

소독차가 지나가던 저녁 무렵,

신문지로 방독면을 만들어 쓰고

하얀 연기 속을 달리던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

그 연기 속에서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게 두렵지 않았다.


골목길 한가운데 돌담에 걸터앉아

해가 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날들,

무화과를 따먹고, 전봇대에 고무줄을 걸고

“금강산 찾아가자~” 노래 부르며 놀던 시간들.

달리기 시합에 늘 꼴찌였던 나는

출발선에서 떨리던 심장소리까지도 또렷이 떠오른다.

그 모든 순간이

마치 아직 거기 머물고 있는 듯했다.

1979년 할머니와 고모들

골목은 시간을 품고 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것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그 길 곳곳에 남아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골목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그곳에 가면 내 마음이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웃음이, 여름 바람이 살아 숨 쉬는

그런 골목 하나.


그래서 골목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추억을 품고, 시간을 품고,

그리고 어느 날엔

지친 나를 꼭 안아주는 품이 되어준다.


어쩌면 나는 그 골목을 걷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골목이 나를 품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시간 속의 골목을 따라

기억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골목길이 놀이터인 아이들
2024년 2월, 골목길을 추억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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