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ㅡ어른이 되어보니
어느 날 문득, 책을 펼치기도 전에 뒷표지 문장에 오래 머문 적이 있다.
짧은 다섯 문장이었지만, 그 안엔 어른이 된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문장들을 따라 천천히 내 마음의 무늬를 써 내려가 본다.
“어른은 겁이 많다.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누구보다 담대해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 마음속엔 작고 여린 겁을 품고 있다.
이제는 실수 한 번이 너무 많은 것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아이들 앞에서는 든든한 어른이지만, 퇴직 후 삶을 상상하면 불안해지는 나.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보고 싶은데, '혹시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마음이 먼저 앞선다.
그래서일까, 어른이 되면 처음보다 망설임이 많아진다.
“어른은 그래도 여유가 있다.
생각대로 안 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을 아니까.”
예전엔 계획이 틀어지면 속상해했고, 누군가 약속을 어기면 하루 종일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생각대로 안 되는 게 더 자연스럽고, 세상은 늘 예상 밖이라는 걸.
버스를 놓쳐도, 비가 와서 여행이 망쳐져도 “원래 그런 거지 뭐” 하며 웃을 수 있는 여유.
자식이 시험을 망쳤다고 울 때, 다독이며 말한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어른은 오지랖이 넓다.
다 내 자식 일 같고 내 부모 일 같으니까.”
길에서 넘어지는 아이를 보면 내 아이인 듯 걱정이 되고,
동네 어르신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걸 보면 내 부모처럼 다가가게 된다.
젊은 날엔 '내 일도 바쁜데'라며 모른 척 지나쳤지만,
이제는 모든 타인의 삶이 어쩐지 내 일처럼 느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마음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걸까.
“어른은 달달한 커피가 좋다.
그동안 너무 쓴맛을 많이 보고 싶었으니까.”
요즘따라 블랙커피보다 라떼를 찾게 되었다.
단맛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 쓴 하루가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모진 말과 서운한 표정들, 뜻하지 않게 흘린 눈물들…
그 모든 쓴맛을 삼켜내느라 지쳤던 나에게, 달달한 커피 한 잔은 위로가 되어준다.
그 단맛이 단순히 혀가 아닌, 마음을 감싸 안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른은 눈물이 많다.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눈물이 넘칠 때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드라마 속 사소한 장면을 보며 눈물이 흐르고,
"나 다녀올게"라는 아이의 짧은 인사에도 울컥해진다.
참고, 넘기고, 모른 척하며 쌓아둔 감정들이
어느 날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때가 있다.
그 긴 세월을 견딘 나에게, 눈물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차곡차곡 모은 마음이 흘러내리는 또 하나의 언어인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건
조금 더 많이 알고, 조금 더 많이 참고,
조금 더 많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닐까.
오늘 나는, 그 문장들을 따라 어른으로 살아가는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런 나도 참 괜찮다고, 토닥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