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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by 봄날의꽃잎

이별(離別).

‘離’는 떨어질 리, ‘別’은 나눌 별.

함께하던 마음이 서로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다.

이별은 단순히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자, 내 안의 한 시절이 저물어가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별’이라 하면 눈물부터 떠올리지만,

정작 이별은 눈물보다도 ‘결심’에 더 가깝다.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

그게 진짜 이별의 시작이다.


나는 오랫동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억지로라도 웃으며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라고 말했다.


그날도 그랬다.

하루 종일 바빴는데, 한 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내일 행사에 사회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잠깐이면 돼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일정이 꽉 차 있었지만, 입에서는 저절로 말이 나왔다.

“아… 네, 한번 맞춰볼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왜 나는 또 거절을 못 했을까.’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는데,

상대가 실망할까 봐, 나를 불편한 사람이라 여길까 봐,

끝내 내 마음보다 관계를 먼저 선택하고 말았다.


그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회의 자리에서 누군가 내 의견을 끊어도 웃으며 넘겼고,

“괜히 분위기 흐리면 안 되지.” 하며 삼켜버렸다.

심지어 잘못이 아닌 일에도 “제가 더 신경 쓸게요.”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그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관계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그렇게 관계를 지킬수록, 정작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는 걸.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데,

나는 늘 남의 표정과 말투를 먼저 살폈다.


그날 밤, 거울 앞에 서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하자. 예전에 관계에서 망설이던 나와 이별하자.”


그 결심은 큰 사건 없이 조용히 시작됐다.

크게 싸운 것도, 원망한 것도 없었다.

그냥 ‘이젠 됐다’는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그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손에서 끈을 놓았는데도, 손바닥은 시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자유가 남았다.


그 후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 부탁을 하면, 잠시 멈춰 생각한다.

예전엔 무조건 “네”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이번엔 어렵겠어요.”라고 솔직히 말한다.

상대의 표정이 잠시 굳어도, 내 마음은 후련하다.

관계를 지키려 애쓰던 시간보다

이제는 나를 이해하려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예전의 나는 거절하면 관계가 멀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짜 멀어지는 건, 나 자신과의 거리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사람 사이의 온도는 맞추는 게 아니라,

서로의 온도를 존중하는 데서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이별이 늘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이별해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관계가 있다.

그 자유는 누군가를 밀어내서 얻은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지켜낸 결과였다.


예전엔 ‘이 정도쯤은 참아야지’, ‘관계를 위해서라면 이쯤은 괜찮아’라며

내 감정을 밀어 넣고 살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니 마음이 점점 닳아 있었다.

하지만 나와의 이별 이후엔 다르다.

이제는 내 마음이 먼저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해도 죄책감이 아닌 안도감이 남고,

불편한 자리를 피할 때도 미안함보다 평온함이 크다.


관계는 여전히 어렵고, 사람 사이엔 늘 조심스러움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모든 걸 맞추려 하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지도, 내 탓만 하지도 않는다.

대신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본다.

가까워도 좋고, 멀어져도 괜찮다.

누군가와의 간격이 나의 가치를 정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때로는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럽다.

그때는 왜 그렇게 애썼을까 싶다가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단단해졌다는 걸 안다.

이별은 그렇게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세웠다.

그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의 낡은 두려움을 떠나보내는 일이었다.


이별의 반대말은 만남이 아니라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예전의 나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내 마음을 잊고 살던 그 시절의 나.

이젠 그때의 나에게 조용히 말해준다.

“고생했어. 이젠 괜찮아. 이제 나답게 살아도 돼.”


이별은 끝이 아니라, 나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그 시간을 지나며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따뜻해졌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살던 마음 대신,

이제는 나 자신을 이해해주며 살아간다.

그게 내가 경험한 가장 성숙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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