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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기 Dec 15. 2021

[릴레이] | 아주 오랜만에 네가 꿈에 나왔다

릴레이 소설을 쓰기로 했다.

아주 오랜만에 네가 꿈에 나왔다.


우리는 복도에서 마주쳤어. 나는 너의 곁을 무심히 지나가려는데 네가 나의 팔을 붙잡더라. 아니, 내가 먼저 너에게 나의 팔을 내어 주었나. 체육복 바지를 입고 교복 상의를 아무렇게 걸쳐 입은 걸 보니 아마도 오늘 체육 시간이 있었나 보다. 너의 환한 미소 뒤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어. 여름인 것 같아. 아니다. 창 너머 운동장 가장자리로 하얀 눈이 반짝이는 거 보면 유난히 햇살이 따뜻한 겨울날인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네가 입고 있는 건 하복인가 동복인가. 너는 나를 기껏 붙잡아 그저 인사 한마디를 건네고는 쿨하게 뒤돌아 가버린다. 복도 끝으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너의 뒤통수가 흐릿하게 뭉개진다. 나는 너를 쫓아가려는데 다리가 영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아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불을 걷어차며 잠에서 깼다. 참으로 엿 같은 꿈이다. 꿈이든 현실이든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린 것은 7년 만의 일인 것 같지만, 꿈이든 현실이든 그 애를 만났을 때의 감각은 동일한 것 같다. 꿈이 아닌 실제는 이러하다.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6년 중 몇 번이나 같은 반이었던 것 같은데 그 나잇대 애들이 그렇듯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몰려다니고 남자애들은 쉬는 시간이면 우르르 밖에 나가 축구나 하는 탓에 그 애와 나는 딱히 친해질 계기가 없이 그저 같은 반 애 정도로 서로를 생각하곤 했었다. 그 애는 대체로 조용하지만 가끔 이상한 장난을 쳐서 선생님들한테 종종 혼이 나는, 그래서 어딘가 조금 모자란 인상을 주는 애였다. 그러다 정말 어떤 이유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유는 정말 잘 모르겠다. 까불거리면서 다른 여자애를 놀리다가 막상 상대가 눈물을 터트리니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그 아이의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귀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생의 손을 꼭 잡고 하교하던 모습을 보며 은근히 착한 애인 가보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건 그 애 앞에 서면 어쩐지 가슴이 콩닥이며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평소와는 어색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춘기의 문턱에 선 그 아이는 아직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말간 얼굴에서는 6학년 남자애들 특유의 허세와 호기로움이 느껴지지 않아 덜 재수 없는 편이었다. 오히려 내 쪽은 신체적 변화가 이른 편이라 그런지 또래 여자애들보다 성숙한 느낌이었고, 나름 인기 있는 그룹에 속해 이미 초등학교 때 두 번의 짧은 연애와 이별을 경험했었다. 그 자신감에 힘입어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발렌타인데이에 상자 안에 초콜릿과 편지를 넣어 그 아이에게 주고야 말았다.


나의 담대한 고백엔 한 가지 큰 실수가 있었다. 발렌타이데이 바로 다음 날이 졸업식이어서 3월 2일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 애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의 깜찍한 고백에 대한 그 애의 답을 바로 들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나의 인기를 그 애의 인기에 견주면서 당연히 그 애가 나의 고백을 받아주리라는 막연한 낙관주의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그 애에게서 어떤 형식으로든 답이 오지 않자, 나는 점점 초조해져 가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하루 종일 전화기 앞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마 전화를 걸만한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행여라도 그 애가 나에게 ‘미안해’라고 말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겨울의 매서운 냉기가 옅어지던 무렵, 나는 그 애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 앞이나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에서 한참을 서성이면서 그 애와 마주치지 않을까 혹은 그 애의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발견하지 않을까, 하며 같은 자리를 맴맴 돌곤 했었다. 왠지 차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것을 내 손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불안과 초조, 단념의 시간을 지나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드디어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 우리는 입학식이 진행되는 운동장에서 약 보름 만에 얼굴을 보게 되었다. 둘 다 손등까지 내려오는 긴 교복 마이를 입고 있었고 꽃샘추위 속에서 오래 서 있어 얼굴이 잔뜩 얼어붙은 모양새였다. 놀랍게도 너는 고작 보름 전보다 키가 훌쩍 자라 어쩐지 초등학생 일 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등학생 때에는 허구한 날 쭈글한 바지에 흙 묻는 티셔츠만 입고 다니다가 네가 중학생이 되어 멀끔한 정장 교복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 교복 빨이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화를 내거나 모른 척을 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는데, 나는 어이없게도 너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고개는 푹 숙이고 있었지만 입꼬리 근육은 자꾸만 비죽비죽 올라갔다. 더 어이없는 것은 너의 태도였다. 너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내가 모른 척 하자 고개를 갸웃이며 성큼성큼 다가와 내 이름을 불렀다. 너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들어 세상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하. 안녕? 오랜만이네. 너 몇 반이야? 나는 3반. 아 나는 4반인데. 옆 반이네. 그러게. 그럼 나는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안녕.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 아이의 행동과 태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떻게 그 아이는 나의 고백을 받고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으며, 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꽤나 친근한 태도로. 나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첫 번째 가설. 내가 건넨 초콜릿 상자에 편지가 빠져 있었다. 그래서 걔는 내가 그냥 초콜릿을 선물한 것이며 그 정도는 충분히 보통의 친구 사이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두 번째 가설. 사실 오랜만에 학교에서 만나 거절 혹은 수락을 하려고 말을 걸은 건데 본인도 긴장해서 본론을 말하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세 번째 가설. 알고 보니 나 말고도 수많은 여자애들이 그 애한테 초콜릿을 줬다. 나는 그의 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네 번째 가설. 그는 이미 우리가 사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아까의 인사는 남자친구로서 건네는 인사다. 

무엇 하나도 그 애의 행동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한 채 나는 머릿속으로 행복 회로와 불행 회로를 번갈아 가면서 돌렸다. 회로가 바뀔 때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가 철렁 내려앉으며 요동을 쳤다.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애가 여전히 좋았다.


이후의 내 학교생활은 첩보원 내지는 수색대원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그 애가 있는 3반 교실을 기웃거렸다. 안타깝게도 그 반에 친한 친구가 없었기에 그 애의 새 학교 생활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모든 것을 우연에 맡겨야 했다. 나의 하루 운세는 그날 너를 만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쏘다녔는데도 다행히 반에서 금방 친한 친구들을 만들게 되었고, 나는 나의 중대한 고민을 새로운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에 호들갑을 떨다가 그 애의 모호한 태도에 대신 분개해주었고, 3반에 있는 각자의 친구들을 통해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중 제일 놀라운 소식은 그 반 여자애들 사이에서 그 애의 인기가 상당하다는 것과 이미 몇 명의 여자애들이 그 애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왠지 분했다. 그 애는 초등학교 때 여자애들에게 인기 없는 걸로 손꼽히는 남자애 중 하나였다. 여자애들끼리 화장실에 삼삼오오 모여서 마음에 드는 남자애 이름을 하나씩 꼽을 때, 그 애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운동이나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 애의 가치를 내가 제일 먼저 알아봤는데, 나는 그 애와 같은 반조차 아니라는 사실이 억울했다. 더욱 억울하고 환장할 노릇인 것은 그 애를 두고 들리는 소문 중에 그 애가 이미 여자 친구가 있으며, 그 여자 친구가 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친구가 걔한테 너랑 사귀는 거라고 물어봤는데, 딱히 부정을 안 하더라는 거야. 걔 이미 너랑 사귀고 있는 걸로 아는 거 아니야? 

친구의 말에 나는 너무나도 황당하여 말문을 잃었다. 제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네 번째 가설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재 그 애와 나의 관계가 사귀는 사이라고 보기에는 굉장한 억지가 있었다. 우리는 입학 후 한 달이 넘어가도록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눈 것 이외에 따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나마 길게 대화했던 것이 내가 일부러 그 애의 교과서를 빌렸을 때 정도랄까. 이미 두 번의 연애 경험이 있는 나에게 이것이 연애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렇다면 그 애는 왜 나와 사귄다는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애에게 초콜릿을 준지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그 사이에 학년과 학교와 주변 친구들이 바뀌었는데 그 애와 나의 관계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궁금함과 답답함에 견딜 수 없던 나는 드디어 까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주 오랜만에 네가 꿈에 나왔다.


우리는 아주 오래 전의 그 복도에서 마주쳤어. 막 체육이 끝났었는지 나는 체육복 바지를 입고 위에는 교복 상의를 걸쳐 입었지. 멀리서 새초롬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너를 보면서 혹시 땀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살짝 스쳤어. 창밖으로 드리우는 햇살이 밝다 못해 뜨거운 거 보니 여름인 것 같다. 아니, 주변은 차가운 데 네 주위만 따뜻한 걸 보니 겨울일까. 나는 우연히 마주친 네가 반가워서 활짝 웃어 보이는데 너는 그 새초롬한 표정으로 나를 지나치려는 것 같았지. 네가 나를 못 봤을지도 모르고,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 문제는 내가 나도 모르게 네 팔을 잡아챘다는 거야. 아니, 네가 잡혀준 건가. 정신 차려 내 손에 붙들린 네 팔을 보자 민망함이 나를 덮쳐 왔지. 당황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네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안녕, 하고 인사를 하고는 답도 듣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복도를 쭉 걸어왔어. 한참 지나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데 네 뒤통수가 흐릿하게 뭉개질 정도로 멀어져 있었지. 나는 너를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영 나오지 않아. 힘겹게 목에 힘을 주다가,


Rrrrrr


휴대폰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진다. 잠이 아직 덜 깬 나는 천장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나는 그제야 내가 오래전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꿈에서 나온 장면은 있었던 일일까 상상일까. 더듬더듬 사이드 테이블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드니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시간을 보아하니 새벽 4시다. 보이스피싱도 걸려오지 않을 시간. 혹시 본가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나서 전화를 받아본다.


“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준호네 집이죠?”


어린 여자아이의 해맑은 목소리. 그나저나, 집이냐고?


“네, 제가 김준호는 맞는데요. 누구시죠?”


상대편은 답이 없다. 아니, 이 새벽에 장난전화인가?


“이 새벽에 누구시냐고요.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새벽이요? 지금 새벽 아닌데요?”


이 여자애 뭐지. 슬슬 화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와, 요즘도 장난 전화를 거는 애가 다 있네.”

“장난 전화 아니에요. 저 김준호한테 전화 걸었는데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하, 내가 김준호라고. 너 전화 잘못 건 거 아니니? 혹시 장난 전화면 새벽 4시에 장난 전화 거는 거 아니다.”

“김준호라고? 너야말로 장난치는 거야? 지금 오후 4신데 뭘 자꾸 새벽이라는 거야.”

“하, 전화 끊는다. 너 다시 장난전화 걸면 아저씨 신고할 거야. 너 발신 번호도 다 뜨는데 어쩌려고 장난 전화냐, 요즘 같은 세상에. 그리고 학생이 일찍 일찍 안 자면 키가 안 커요. 너 나중에……”


진짜 후회한다, 아저씨가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이야 하고 얘기를 이어가려는데


“J 중학교 1학년 3반 김준호 전화번호 아니에요?”


하고 조그마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신종 보이스 피싱인가?


“너 누구야? 너 내가 나온 중학교랑 1학년 때 반은 어떻게 알았어? 너 뭐야? 신종 보이스 피싱이야?”

“보이스 피…? 그게 뭔데요? 저 J 중학교 1학년 4반 서지연인데요. 진짜 준호 번호 아니에요?”


문득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손이 멈칫한다. 지연이라니. 어제 결혼해서 신혼여행 간 그 서지연? 나는 모든 사고가 멈추었다. 보이스 피싱이라기엔 지연이 이름으로 전화라니. 그것도 이 새벽에.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얘기를 더 나누기엔. 그렇다면 본인이 중학교 1학년이라고 주장하는 그 서지연이었다.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서지연. 너는 신혼여행 가서까지 장난치고 싶냐. 지금 한국 몇 신지 알아?”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신혼? 제가 중학교 1학년인데 무슨 신혼여행을 가요!”

“야, 이제 장난 그만 쳐. 신혼여행 갔으면 남편이랑 오붓하게 시간이나 보낼 것이지. 이거 민성이 새끼 아이디어냐?”

“민성이?”

“너, 진짜, 목소리까지 바꾸고. 니가 선생님이 아니라 연기자를 했어야 되지. 연극반 할 때는 연기가 그지 같아서 나무나 하던 게”

“…저, 진짜, 장난 아닌데”

“어? 울기까지 하고.”

“저, 흑, 진짜 준호한테 전화 걸었는데요.”


목소리가 흔들거리는듯하더니 울먹거린다. 아니, 연기를 제 남편한테나 하지. 안 그래도 누구 때문에 심란한데 새벽 네 시에 전화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야, 서지연. 알았어. 네가 지금까지 숨겨온 엄청난 탤런트에 내가 진짜 감동이 밀려온다. 올해 여우주연상은 네 거야. 뚝 그쳐라. 진짜 장난도 정성스럽다. 나 잔다.”

“아, 아저씨.”

“야, 그만하라니까.”

“아저씨 진짜 준호 아니에요?”

“맞아, J 중학교 1학년 3반 출신 57회 졸업생 김준호. 너는 1학년 때 4반이었고, 57회 졸업생 서지연이고. 우리는 올해 서른하나고. 너는 어제 결혼을 했고. 결혼 겁나 축하한다. 고맙단 말은 지금 말고 신혼여행 갔다 와서 하고. 나 내일 출근해야 돼.”


말을 이어가던 찰나 그녀가 내 말을 채간다.


“57회 졸업생이요?”

“응”

“서른한 살이라고요?”

“얘가 진짜 왜 이래?”

“…아저씨가 J 중학교 57회 김준호 졸업생이고, 지금은 서른하나라고요?”

“서지연,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그럼 거기가 몇 년도라는 거예요?”

“몇 년도긴 2021년이지. 너 무슨 몰래카메라 같은 거 신청했어?”

“그러니까 아저씨는 김준호고 지금 2021년 새벽 4시라고요?”

“…응”


어디까지 장단을 맞춰줘야 되는지, 얘가 무슨 이상한 상황에 빠진 건 아닌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저씨. 저는 2004년 오후 4시예요. 저는 J 중학교 1학년 6반 서지연이고, 14살이고요.”

“하, 지연아. 나 자면 안 되는 거야? 아님 너 진짜 정신병 뭐 그런 거야?”

“김준호가 장난치는 게 아니고, 아저씨가 정신 나간 게 아니라면.”

“뭐래.”

“지금 이 전화, 엄청 특별한 전화 같은데요. 제가 예기치 않게 실례를 한 것 같지만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들뜨게 느껴졌다.



어제 믿기지 않는 일을 겪었다. 서른하나의 김준호와 통화를 했다. 서른하나가 된 나는 민성이라는 대학 동기와 결혼을 했다고 했다. 내가 서른하나라니! 대학도 가고, 결혼도 하는구나. 혹시 어제 꿈을 꾼 걸까? 아니,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잖아. 전혀 졸리지 않았는걸. 본인이 김준호라던 그 아저씨는 새벽 4시에 전화를 받았다고 했으니 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일을 곱씹다가 늦게 자는 바람에 결국 늦게 일어나고 늦게 집을 나왔다. 그런데도 두 다리가 뛰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내 머리로는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경험을 하고 나니 여러 생각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준호랑 나는 친구로 남는구나’라는 사실을 곱씹게 됐다.


“야, 서지연.”

“어?”


갑자기 어깨를 툭 쳐오며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준호다. 순간 깜짝 놀랐다.


“악!”

“아씨, 놀래라. 갑자기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아침 시간 바삐 걷는 걸음들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이곳으로 향했다. 큼큼 괜히 목소리를 다듬어본다.


“흠, 별거 아냐. 갑자기 부르니까 놀랐잖아.”

“왜, 나한테 죄진 거 있냐.”

“내가 너한테 죄질 게 뭐가 있냐.”

“근데 너 안 뛰어?”

“응?”

“안 뛰면 지각인데?”

“그냥 지각하지, 뭐.”

“뭐야, 사춘기 반항 그런 거야?”

“웃기네. 무슨 반항이야. 그냥 생각할게 너무 많아서 그래. 너나 뛰어가. 나 땜에 지각하겠다.”

“됐어. 같이 늦지 뭐.”


본인 말이라도 증명해 보이려는 듯 그는 발걸음을 더 늦춘다.


“무슨 일인데 그래? 뭐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고민은 무슨.”

“그럼 왜 그러는데?”


나는 준호 얼굴을 한 번 쓱 본다. 너 때문이다, 이놈아. 목구멍에 쳐 오르는 걸 간신히 누른다.


“너 타임머신 같은 거 믿어?”

“뭐?”

“어딘가 타임머신 같은 거 있을 거 같지 않아?”

“갑자기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아니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다든지.”

“너 무슨 만화 같은 거 봤어?”

“아니다, 됐다.”

“너 진짜 오늘 이상해.”

“그래, 나 오늘 진짜 이상해.”


휴, 한숨을 쉬고 앞을 향해 걷는다. 준호는 계속 궁금한 얼굴을 했지만 더 묻지는 않고 그저 발걸음을 맞춰줄 뿐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분명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피곤함 속에서 복잡한 마음을 쉬이 다잡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 잠들었으니까. 꿈이 하도 생생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연이한테 연락했지만, 그녀는 몇 번을 물어도 나에게 전화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14살의 서지연. 그녀가 며칠이고 계속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그것이 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지연이는 일주일째 매일 전화를 걸어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아저씨”

“너 자꾸 잊나 본데 여긴 새벽이야”

“저도 알아요. 근데 다른 시간에는 전화가 안 되고 여기 시간으로 오후 4시, 거기 시간으로 새벽 4시. 이렇게만 전화가 되는 걸 어떡해요.”


그녀는 사실 14살의 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받았다고 했다. 다른 시간에는 전화를 거니 계속 14살의 내가 받아서 지금 매우 난감한 상황이라고도 했다.


“오늘 거의 열 통은 걸었을 걸요. 준호가 나중에는 짜증을 다 내더라고요. 원래 짜증 잘 안 내는데.”


그렇게 지연이는 끈질기게 몇 번씩 나와의 연락을 시도했고, 결국 4시에만 나랑 연락이 닿는 걸 알아냈다. 그러고 보니 서지연이 나에게 계속 장난 전화를 걸어서 나중에는 내가 크게 화를 냈던 일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처음에는 숙제를 묻더니 나중에는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걸 묻고, 뭐 그런 쓸데없는 질문들을 한다고 전화를 수십 통을 해댔다. 나도 사람인지라 나중에는 짜증이 난 바람에 너무 버럭 해서 그런지 한동안 서로 말을 안 섞었다. 화가 계속 났다기보다는 계속 말을 안 하다 보니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거의 한 달 정도는 말을 안 했던가.


“너 준호한테 말은 걸어봤어?”

“네?”

“왜 나한테 연락해 본다고 계속 전화 걸었던 날. 준호가 화를 엄청 냈다며.”

“맞아요. 화 많이 났나 봐요. 화내는 거 처음 봤어요.”

“그때 우리 거의 한 달은 말을 안 한 거 같은데.”

“한 달이요?”

“내가 화냈다고 네가 같이 화나서 내가 한동안 말도 못 붙였잖아.”

“아니, 나 그렇게 화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준호가 화가 많이 난 거 같아서…….”


아, 그런 거였어?


“말은 붙이고 싶은데 더 화내면 어떡해요. 조금 있으면 풀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한 달은 너무 쫌생이 아니에요?”

“야, 나도 그렇게 화났던 거 아니거든. 내가 생각보다 너무 버럭 한 거 같아서 뭐라고 해야 될지 몰라서 말을 못 붙인 거지.”

“아, 그런 거예요?”

“야, 뭐, 친구랑 너무 오래 싸우면 별일 아닌데도 멀어진다. 빨리 화해해.”

“오, 알겠어요. 기분이 매우 이상하지만 조언 감사해요.”

“그나저나 너 원래도 14살 나한테 전화 걸려고 했던 거지? 왜 전화한 거야?”

“아, 아저씨니까 답해줄 수 있겠다. 아니, 얼마 전에 준호네 반 친구가 준호한테 나랑 사귀냐고 물어봤다는 거예요.”

“어, 그래. 뭐. 어릴 땐 그런 오해 종종 받았지.”

“오해예요? 준호는 아니라고 답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웃었다던데요.”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도 헷갈렸던 때가 있었거든. 지연이랑 무슨 관계인 건지.”

“헷갈린다?”

“근데 그냥 결국 우린 친구였어. 그러니까 결혼한 지금도 좋은 친구로 지내지.”

“헷갈렸다는 건 결국 준호는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는 거예요?”


서지연. 원래도 이렇게 돌직구였나?


“사춘기였고, 그런 게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니까.”

“근데 아니었다?”

“지연이는 아니었던 건 확실해.”

“제가 아니라고요?”

“아니, 내가 왜 너랑 이런 얘길 하고 있지?”

“아저씨, 제가 아니라고요?”

“너는 근데 나 계속 아저씨라고 하는 거야? 나 결혼 안 했어.”

“서른하나면 아저씨죠.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내가 준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열네 살 때 누구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가 뭐 서른하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줄 알어?”

“와, 아저씨. 아저씨, 진짜 바보네요.”

“뭐?”

“와, 김준호, 이 머저리 같은. 이게 진짜, 멍청이야, 뭐야?”

“야, 말이 험해진다.”

“아저씨, 잘 들어요. 나는 지금 준호 좋아한다고요. 준호 마음 모르겠어서 전화 걸어서 확인하고 싶었던 건데.”

“뭐?”

“그럼 저희 이후에도 한 번도 사귄 적 없어요?”

“없는데?”

“하, 아저씨. 할 일 생겼어요.”

“뭘?”

“저 준호랑 잘 되게, 아저씨가 도와주세요.”

“뭐?”


참나 자기가 먼저 그래 놓고 나한테 잘되게 도와달라니. 이제 와서 왜 이러나 싶어 어이가 없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14살이면 그 일보다도 더 전이구나 싶어 또 어이가 없다. 네가 진짜 한 치 앞도 모르고 저 순진하고도 뻔뻔한 말을 하는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둘이 잘되게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잠시나마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아주 만약에 우리 반이 그날 체육 수업이 아니었다면, 정말 만약에 내가 네 팔을 붙잡고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엉거주춤한 포즈로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네 모습이 유난히 귀여워 보였을 때, 내가 사귀자고 고백을 했더라면. 우리도 어쩌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갑자기 중학생이라도 된 듯 고민하는 내 모습이 어지간히 웃겨 웃음이 난다. 도와서 될 일이었다면 돕지 않았어도 됐겠지. 일주일째 이어지는 14살 서지연과의 인연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아저씨, 저 지금 진짜 진지한데 왜 그렇게 웃어요.”

“아니, 우리한테도 되게 풋풋했던 시절도 있었구나. 니 덕분에 새삼 떠오르네. 귀엽다, 서지연. 그런 걸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 너랑 내가 알아서 해야지. 그런 부탁할 거면 이제 전화 그만해라. 나중에 신혼여행에서 지금 한 말 떠올리면서 벽 차지 말고.”

“아, 아저씨가 준호면 준호 마음이 아저씨 마음인데 아저씨가 그걸 왜 못해요.”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거야.”

“도와달라니까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그게 맞는 거야. 끊는다.”


그러고 보니 31살의 서지연은 지금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으려나. 나중에 다시 전화해서 오늘 일 기억나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때 네가 날 이렇게까지 좋아했던 거냐고. 앞으로 족히 50년 놀림감은 되겠네.




아주, 아주 오랜만에 그때의 네가 꿈에 나왔다.


우리는 어김없이 또 그 복도에서 마주쳤어. 막 체육이 끝났는지 너는 체육복 바지를 입고 위에는 교복 상의를 걸쳐 입었지. 멀리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너를 보곤 반가움에 활짝 웃었어. 너는 내 팔을 붙잡았고 나도 네게 팔을 내어준 채 가만히 서 있었지. 우리의 그 시절만큼이나 푸른 나뭇잎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걸 보니 여름인 것 같다. 아니, 잎이 아닌가. 추위 때문인지 쑥스러움 때문인지 붉게 튼 두 볼에서 후 하고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아른거리는 걸 보니 겨울인 것도 같다. 네게 팔을 붙잡힌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향해 너는 아주 환한 미소로 안녕, 하고 인사했지. 그 해맑은 표정이 참 따뜻해서 나도 따라 더 크게 웃어 보였어. 그리고는 너는 복도를 따라 앞으로, 앞으로 다시 걸어갔어. 나 역시 가던 길을 향해 반대쪽 복도로 걸어갔지. 한참을 걷다 네가 잘 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어.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너도 뒤를 돌아 나를 봤지. 멀리, 보일 듯 말 듯 아주 멀리에 서서 우린 또 한 번 서로를 향해 웃으며, 손을 들고, 가볍게 흔드는데,


Rrrrrr


뭐지. 출근 시간인가. 나 어제 결혼하고 신혼여행 온 거 아니야? 여기 한국인가? 늦잠 잤나. 어찌나 놀랐는지 첫 번째 벨 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낯선 리조트 침실의 풍경과 옆에 잠든 민성이를 보고 나서야 여기가 몰디브가 맞구나 싶다. 민성이가 깨기 전에 얼른 휴대폰 소리를 끄고 화면을 보니 준호다.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이 있으면 새벽 4시에 신혼여행 간 친구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호텔 테라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아니, 너 새벽에 나한테 전화했어? 지금 아침 8시니까 한 4시간 전쯤?”

“뭔 소릴 하는 거야. 거기서 아침 8시면 여긴 지금 새벽 4시야. 4시간 전이면 밤 12신데 내가 신혼여행 와서 그 시간에 민성이랑 놀지 너한테 전화를 왜 하냐.”

“너 민성이랑 짜고 뭐 장난친 거 아니야?”

“니가 대체 뭐라고 우리가 신혼여행 와서까지 너한테 장난을 쳐. 너 나 결혼했다고 슬퍼서 밤새 술 퍼마시다 꿈꾼 거 아니야? 너 아직도 나 좋아하니?”

“하.. 결혼하더니 더 소름 돋아졌네. 그냥 가서 잠이나 자. 내가 뭐 착각했나 봐.”


준호의 전화를 끊고는 테라스에 있는 2인용 테이블에 잠시 앉았다. 혹시 그날일까. 어렴풋이 준호가 넌 어제 신혼여행 갔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내가 17년 전에 놀란 걸 넌 이제야 놀라는구나. 혹시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혼자 어안이 벙벙하고 있을 준호 모습을 상상하니 쌤통이다 싶기도 하고, 드디어 이 일이 나만의 기억인 게 아니라는 생각에 왠지 기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준호랑 나랑 잘되게 해달라고 소리 지르고 악을 썼던 통화도 생각이 난다. 그것 가지고 또 엄청 놀려먹게 생겼네.


14살의 그날, 처음 31살의 준호와 통화를 하게 됐던 날은 아무 특별할 것 없으면서도 특별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에 다녀와서는 처음으로 준호네 집에 전화를 했던 날. 31살 준호의 목소릴 들었을 땐 웬 여자애가 준호를 찾는 걸 보고 준호의 아버지나 형이 장난을 치는 건가 했다. 그러다 얘가 내 전화 피하려고 목소리를 부러 바꿨나 싶기도 했고. 오랜 통화 끝에 퍼즐을 짜 맞춰 본 결과는 하나였다. 14살의 내가 오후 4시에 전화를 걸면 31살의 준호는 새벽 4시에 전화를 받는다는 것.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니. 지금 같았으면 믿기 더 어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14살의 나는 의심보다는 호기심이 강했고, 현실은 미처 상상을 뛰어넘지 못했던 때였다. 호들갑스러웠던 나와 달리 31살의 준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나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때 준호는 참 피곤했겠구나 싶다. 아니, 요즘 참 피곤하겠구나, 라는 말이 맞는 건가. 나는 일주일 내내 매일같이 전화를 했었다. 나야 오후 4시였지만 준호에게는 새벽 4시였으니 오죽했을까. 통화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준호와 나는 31살이 되기까지 결국 단 한 번도 사귄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우리가 사귈 수 있게 도와달라고 생떼를 썼다. 준호는 마치 도와줄 방법을 궁리라도 하듯 오래 뜸을 들였지만 끝내 돌아온 대답은 안된다는 거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그게 맞는 거야.” 그때는 그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14살 때나 31살 때나 우유부단하고 모든 걸 여자에게 맡기고 피하기나 하는 놈. 분했다. 혹여 준호는 날 좋아했던 게 아니라서 내가 상처 받을까 저렇게 말한 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왠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14살의 준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31살의 준호에게 거절 아닌 거절을 당하고 나서는 다음날 14살의 준호에게 꽤나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교과서를 빌려 가서는 사인펜으로 낙서를 잔뜩 한 채 돌려줬던가.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31살의 준호와는 연락이 닿질 않았다. 그러고 어느 날 딱 한 번 더 걸렸던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사귈 수 있게 도와달라느니 같은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그때의 나와 우리에 대해 많이 물어본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학교에 들어가 원하는 직업을 얻게 됐는지, 인기는 좀 있었는지, 준호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우린 그때까지 쭉 친구로 지낸 건지, 그럼 우리 둘이 가장 친한 친구인지 뭐 그런 것들. 준호는 뭐든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응, 잘 지내고 있지. 걱정 마” 그리곤 그날이 끝이었다.


혹시나 한 번이라도 더 연결이 될까 싶어 준호네 집에 매일 같이 전화를 했다. 그 덕에 14살 준호와는 이전보다도 훨씬 가까워졌다. 워낙 놀림이 심하던 때라 학교에서는 그렇게까지 친한 척은 못 했지만 통화도 자주 하고 등하굣길도 종종 함께했다. 하지만 우리가 사귀는 사인지 친군지, 너도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감정이 이어졌다. 준호네 집에 처음 전화를 걸었던 그날처럼 다시 한번 더 용기를 내어 물어볼까도 싶었다.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으니 자연스럽게 물어볼 기회는 늘어났지만 웬일인지 그 화제를 꺼내는 건 더 어려워진 느낌이었다. 가장 가깝고 친한 이성 사람 친구. 서로에게 남친 여친만 생기지 않는다면 이 관계도 나쁘지만은 않지 않을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특별하고 설렜으니까.


우리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막 3학년이 된 늦겨울이었는지, 1학기가 끝나가던 초여름이었는지는 기억 속에 희미해진 어느 날, 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체육 수업을 마쳤는지 복도 반대쪽 멀리서 준호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환하게 웃으며 준호에게 다가가려다 문득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 의식되어 그 자리에 가만히 서버렸다. 점점 가까워진 준호는 그런 내 팔을 붙잡아 안녕, 하고 인사했고 난 기분이 좋아 더 크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얘네 사귀냐며 놀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사람의 말에 주변 다른 애들까지 웅성대기 시작하자 준호는 귀가 빨개진 채 황급히 팔을 떼고는 큰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애들의 시선은 이제 복도에 홀로 남은 내게로 일제히 향했다. 나도 얼른 돌아서 반대쪽 복도로 빠르게 걸어가는데 멀리서 얼핏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동네 친구야. 이렇게 애들 많은 데서 팔 붙잡고 인사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친구.”

“너네 1학년 때 사귄다고 소문도 나지 않았어? 진짜 아무 사이 아닌 거 맞아?”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그니까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지.”

“그럼 서지연 나 소개시켜줘. 난 너랑 무슨 사이인 줄 알고 물어보지도 못했잖아.”

“...”

“응? 응??”


나는 그날 내 청력이 그렇게나 좋았는지 처음 알았다. 그들의 대화에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을 때 준호도 뒤돌아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갔던가. 친구의 마지막 말에 준호가 대답을 했나 안 했나는 기억도 나질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냥 친구. 교실로 돌아와 수업이 시작되고, 그다음 수업을 받고, 점심을 먹고, 자습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까지 머릿속에는 저 말만 맴돌았다. 31살의 준호에게 당한 거절은 거절도 아니었다는 걸. 나름 인기 있다 자부하고 있던 내 자존심까지 와장창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선을 넘으면 어색해질까 참고 조심하던 나 스스로가 정말이지 우스워졌다. 일주일 동안 준호가 지나가면 인사도 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조금 추스르고 나니 나 좋다는 애도 있는데 내가 왜 김준호 이깟 놈 때문에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어졌다. 결국 그날 점심시간, 나는 의기양양하게 준호네 반을 찾아갔고 준호에게 날 소개해달라 조르던 그 애한테 사귀자고 말했다. 그 애는 준호 눈치를 한 번 힐끔 보더니 알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니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그럼 그게 맞는 거라며.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야.”

“응. 알겠어. 축하해.”


31살 준호가 내게 해 준 말을, 16살의 준호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알겠다고 했다. 그 후로 우리는 더 이상 통화를 하지도, 문자를 하지도, 함께 어울리지도 않았다. 어쩌다 지나치면 다른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 채 안녕 인사하고 돌아서는 게 다였다. 아, 홧김에 사귀게 된 준호의 친구와는 3일 만에 헤어졌다. 사귀기로 한 이후 전화번호를 교환하지도, 따로 이야길 하지도, 등하교 한 번 같이 한 적도 없었기에 헤어졌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사귀자고 했던 것처럼 정식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헤어졌다. 준호와 나는 서로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채로 남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때만큼이나 31살의 준호와의 통화가 간절해졌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다시 통화가 된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준호는 또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면 31살의 준호는 이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 테지만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다고 말하던 사람이니까.

중학교를 졸업 후 우리는 각자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여고, 남고로 진학하며 자연스럽게 볼 일이 거의 없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서로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고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도 우린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듯 어색한 인사를 하고 서로의 폰 번호도 물어보지 않은 채 헤어졌다. 나는 틈틈이 준호의 SNS를 염탐하긴 했지만 친구가 아니었기에 볼 수 있는 게시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아주 가끔 이유 없이 중학교 3학년 때의 꿈을 기억이 날듯 말 듯 희미하게 꾸곤 했다. 20대 초까지는 대체로 악몽인 경우가 많았다. 소나기 같은 서정 소설로 시작해서, 복도에서 마주 보고 서서 숙쓰러워하다, 갑자기 나는 다리가 굳어버린 채 홀로 남아 친구들의 야유를 받고, 종내에는 김준호에게 무참히 차이는 악몽.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꿈은 조금 더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 시작한 것 같다. 오늘은 웬일인지 그 꿈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아주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더, 오늘만큼이나 또렷하게 이 꿈을 꾼 적이 있었다. 7년 전 준호를 다시 만나게 됐던 24살의 그날이다.




그날은 꿈을 꾸다가 평소보다 늦게 눈을 뜬 날이었다. 꿈속에서 맥락 없는 모험이 한참 펼쳐지다가 갑자기 익숙한 복도가 나왔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체육복 걸친 김준호가 내 팔을 잡는 익숙한 상황이 이어졌고, 복도 끝에서 뭉개지는 준호의 뒷모습을 끝으로 꿈에서 깨었다. 그 꿈 특유의 찝찝함과 답답함을 오랜만에 느끼는지라 나는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다. 게다가 원래 일어나야 하는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일어났기에 나는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궁시렁거리며 김준호에 대한 의미 없는 저주를 퍼부었다. 까마득한 중학교 시절의 꿈을 이토록 생생하게 꾼 것은 당시의 내가 모교로 교생 실습을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립학교인지라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의 선생님들이 그 학교에 더 이상 계시지 않았고, 또 시설도 어딘가 조금씩 바뀌어 낯선 느낌도 들었지만, 학교에 발을 디디는 순간, 8년 전 철없고 당돌한 중학생 서지연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저 복도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녔었는데. 세상에 화장실이 이렇게 낡았었나? 여기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넘어가는 통로 복도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참 좋아했었는데, 운동장은 조금 작아진 것 같네, 와 같은 감상이 머릿속을 잔뜩 채웠지만 추억을 곰곰이 되씹어보기엔 교생 실습은 숨 쉴 틈 없이 바빴다. 꿈을 꾸느라 늦잠을 잔 그날에는 수업 지도안을 지도 선생님께 확인받는 날이라 한껏 긴장이 된 날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했고, 수업 참관도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아이들 하교 후 지도 선생님께 내민 수업 지도안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아서 아침에 느꼈던 찝찝함은 어느 정도 떨쳐내고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마침 금요일이었고, 싱그러운 꽃 냄새가 진동하는 봄의 끝자락이었다.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해져서 학교가 있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하는데, 어느 골목에서 정말 거짓말처럼 준호와 마주쳤다.


“어!”

“어?”

“야 너 김준호지! 대박”

“와 서지연이야?”


문득 준호와 마주친 이곳이 중학교 입학을 앞둔 내가 손에 입김 불며 서성였던 김준호네 아파트 앞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억이 쪽팔려 나도 모르게 필요도 없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 여기서, 그니까 J중학교에서 교생 하거든. 오늘 일 끝나고 이쪽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이 동네 진짜 오랜만에 왔네. 하하. 넌 어떻게 지내?”

“나야 뭐. 학교 다니고 있지.”


준호의 표정에서 약간의 피곤함과 시니컬함이 묻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한 번에 알아봤나 싶을 정도로 준호는 어린 시절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에도 또래 치고는 큰 키였는데 24살의 준호는 더 훌쩍 자라 있었고, 빼빼 마른 느낌이었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몸에 살이 붙어 거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트레이드 마크였던 안경은 벗은 채였다. 다만, 목소리와 말투는 예전처럼 약간씩 툴툴거리듯 차분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31살의 김준호가 이런 목소리와 가까웠음을, 나는 깊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잠깐만 우리가 지금 몇 살이지?”

“응? 우리 24살인 거 아니야? 벌써 깜박깜박하냐”

“그래. 아직 24살인 너가 뭘 알겠냐”


중학생 시절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나온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24살이었다. 이 세계에 31살에 김준호가 등장하려면 아직 7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새삼 31살의 김준호가 14살의 서지연을 만났을 때 얼마나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을까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준호와 나는 잠시 동네를 걸으며 서로의 근황을 나눴다. 나는 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대학교의 사범대에 재학 중이며, 교생 실습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사범대에 다니는 학생들 대다수가 교사의 꿈을 가지고 있고, 나 역시 교사가 되고 싶어서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다른 재미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교생 실습을 하고 나면 빼도 박도 못 하게 교사가 되어야만 할 것 같아서 대학교 마지막 한 해를 앞두고 휴학을 했다. 반년은 평소 관심 있던 분야에서 일도 하며 돈을 모았고, 남은 반년은 세계여행을 다녔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놀고 돌아다니다 보니, 내가 학교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역설적으로 교생 실습을 할 용기도 생겨 복학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운 좋게 모교에서 실습하며, 후배이자 제자들을 어여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임용 고시를 볼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대신 휴학하며 일하던 기관에서 좋은 제안을 받아 잘만 한다면 졸업하고 바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준호도 자신의 근황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준호는 명문대 법대에 들어갔고 이듬해부터 바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휴학을 거듭하며 고시 공부에 매진하는 바람에 군 입대는 조금 늦어져서 남들 전역하고 복학하는 시기에야 군 입대를 했다고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공익 근무 판정을 받은 그는, 공익인 덕분에 퇴근 후에 공부하면서 흐름을 놓치지 않아 좋다며 웃어 보였다. 사법고시가 몇 년 후 폐지되는지라 그는 고시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은 공익 근무하며 1년, 전역해서 딱 3년만 더 공부해보고 되지 않는다면 로스쿨 진학도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라면 대학교 졸업을 20대 안에는 할 수 있을까 싶어, 라며 준호는 웃으며 말했지만 표정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덤덤한 게 참 얄밉던 녀석이었는데. 고시 공부라는 것이 사람의 여유를 빼앗아가나 싶다.


공부에 눌려있는 듯한 준호에 비하면 나는 어쩐지 인생을 쉽게 내질러 사는 것만 같아서,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준호에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김에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했다. 준호는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퇴근 후 공부에 매진하는 흐름을 깨고 싶지 않다고, 그래도 중간중간 쉬어가며 숨을 돌리는 기간이 있으니 그때 연락을 꼭 하겠노라고 말했다. 나는 어쩐지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준호를 보며 아쉽지만 알겠다고 했다. 문득 31살의 김준호가 하고 있던 직업이 무엇인지 생각났다. 나는 응원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의 인생을 스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준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날 아침 꾸었던 꿈에 대해서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 꿈에 대한 감정이 원망에서 따뜻한 무언가로 바뀐 것은 아마 준호를 응원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리라.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이후 내내 차인 것 같은 마음도 비로소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도, 준호도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나는 그 호감을 표현하는데 너무 적극적이라 어딘지 가벼워 보이는 면이 있었고 준호는 모든 일에 신중하고 시간이 조금 걸리는 친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같은 24살에 와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의 궤도를 타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는 거겠지. 이제야 비로소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거야’라는 31살 김준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꿈에 네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효-현-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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