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소설을 쓰기로 했다.
인생에 흥미가 없어진 지는 꽤 되었다. 그렇다고 죽고 싶냐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인생을 중간에 맘대로 관두는 것은 꽤 무섭기도 꽤 번거롭기도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세상이 한 번에 망하길 빌었다. 간절하게 빌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루가 잘 안 풀리거나 운이 안 좋을 때, 혹은 일에 너무 지친 날이면 아, 그냥 세상이 한 번에 망해서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정도로 구시렁거렸을 뿐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아침부터 일이 안 풀렸다. 늦잠을 잔 날 하필이면 비가 쏟아졌고, 길이 막혔고, 급히 뛰다가 물웅덩이를 밟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아, 그냥 세상이 한 번에 망해버리면 안 되나.” 하고 생각했다. 세상이 망하는 갖가지 상상을 하며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창밖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지독한 어둠 안에 갇혀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려 했지만 정신을 잃기 전 번뜩이던 섬광 외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내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줄 알았다. 죽음이란 이렇게 끝없는 어둠인 건가,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가 죽음인 것인가 생각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어둠 속에 숨죽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됐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훅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조금 뻗어 올린 팔에서 딱딱한 천정이 만져졌다.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자 왼쪽 다리에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내가 누워있던 좁은 공간에서 옆으로 빠져나와 몸을 조심스레 일으키고 절뚝이는 다리로 발을 내디뎠다. 바닥은 겹겹의 돌들이 쌓여 있었다.
바깥으로 나와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내가 며칠간 정신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더듬더듬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배터리가 80% 남은 스마트폰을 쳐다보고서야 내가 17시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진이 났나? 사무실 건물이 부실 공사로 무너져 내린 걸까? 다행히도 깊이 묻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119는 아직 날 못 찾았던 것일까? 그런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나는 낯선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생경함은 37년 평생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켜켜이 무너져 내린 건물들의 잔해를 헤치고 나와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을 켰다. 그리고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제야 내가 느낀 생경함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도시도, 문명도, 사람도. 그저 지독한 어둠과 고요, 폐허가 된 도시, 그리고 나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생경함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것은 지독한 피비린내였다. 그렇다. 세상은 정말 망했고, 나는 홀로 살아남았다.
몇 시간 동안 나는 혹시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계속 소리를 질러 보았다. 산짐승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깜깜했지만 나는 짐승이 눈을 빛내며 내 앞에 나타나는 것보다 아무런 생명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두려워졌다. 그것은 본능이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리의 통증과 계속 변하는 스마트폰 속 시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의심했을 것이다.
멸망한 도시에서 스마트폰은 전혀 스마트하지 않았다. 그나마 쓸 만한 기능은 시계와 조명 정도였다. 처음에는 이동을 해보고자 여기저기 조명을 켜보았지만, 이렇게 깜깜하고 막막한 어둠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스마트폰 조명을 켜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기가 어디인가 파악하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곧 나는 내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명을 비추며 걸어 다니다가 먼지 더미에 소복이 쌓인 어떤 사람의 오른손을 발견한 것이다.
헉-
그 오른손을 발견한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저기요.”
나는 혹시나 그가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 그 손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그것은 너무나 딱딱하고 차가웠다. 조명에 비친 손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것은 낯선 감촉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나는 조금씩 빠르게 걷고, 그러다 뛰었다. 그 손이 마치 나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그 손과 멀리 떨어졌다.
내 다리가 점차 느려지고 결국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뜀박질을 멈췄다. 그나마 평평하면서 내 시야를 막지 않는 널따란 공간에 내 엉덩이를 안착시켰다. 고요한 적막이 나를 잡아먹는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그 새 10%가량 줄어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 나는 해가 뜨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본다. 조명을 끄고 나자 새삼 이 정도로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공간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무 어두워서 현실 세계라는 자각이 들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핵전쟁이 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에게만 이상한 일이 생겨서 뒤틀린 시공간 안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닐까. 짙은 어둠 속에 생각은 점차 절망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엄마나 아빠, 누나는 어떻게 된 걸까. 만약에 내가 어느 공간 속에 갇힌 거라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가족들의 얼굴 뒤로 아까 돌 틈 사이로 보았던 차가운 오른손이 머리를 스친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지만 해결할 방도는 없다. 그저 해가 뜨는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내 생에 가장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새벽 5시가 지나자 서서히 세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 어스름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감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각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도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서울. 세계가 주목하는 첨단 도시이자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한민국의 수도. 높은 건물들로 둘러싸였던 그 도시는 아예 멸하고 없었다. 내 눈앞을 가리는 그 어떤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다 무너져 내린 고층 건물의 잔해들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해가 떠도 짐승의 울음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거리를 즐비하게 늘어뜨렸던 가로수들은커녕 화분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도 북도 동도 서도 없었다. 그저 아수라장의 세상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피부가 데일 듯 뜨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오감은 모두 살아있었지만 모든 감각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망연자실한 눈을 하고 온몸에 힘이 풀린 채로 그저 점차 밝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남들보다 그저 몇 시간 정도만 더 살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멸망한 세상에 온전한 몸과 정신으로 살아남은 것. 그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나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이제는 세상이 꽤 밝아져서 세상의 색이 눈앞에 들어왔다. 멸망한 세상의 색은 건물들의 잔해들로 그득한 회색 빛깔이었다. 모든 생명체를 깔아뭉개고 있는 폐허에서는 정말 역하고 짙은 비린내와 탄 내음이 가득했다. 그곳에는 태양도 없었다. 그저 하늘엔 먼지와 구름이 가득해서 하늘조차 짙은 회색의 기운을 내뿜었다. 그런 잿빛 하늘을 겨우겨우 뚫고 들어오는 태양빛이 겨우겨우 세상을 비추며 아직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세상의 광경을 목도하며 나는 이대로 죽었으면 했다. 그렇지만 너무나 몸도 정신도 멀쩡했다. 심지어 다친 한쪽 다리 때문에 정신은 더더욱 멀쩡해지고 있었다. 목이 너무 말랐다. 죽고 싶었지만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살 생각을 하는 것은 더더욱 두려웠다. 어쨌든 나는 살아있었다. 이러다 죽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주변에 혹시나 먹을 것이라도 있을지 두리번거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물 한 모금은 먹고 죽고 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고, 걸었고, 그렇게 다 망해버린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거리에 나와서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내 위치였다. 무너져 내린 잔해 사이에서 사무실 주변의 지형이나 큰 건물의 잔해들을 찾았다. 하지만 가루가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방향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치 찾는 것을 포기한 후에 그다음으로 찾은 것은 물이었다. 나는 잠깐 하룻밤 사이에 너무 지쳐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물 한 모금이 먹고 싶었다. 주변 경관은 그런 것 따위 남아있지 않았을 거라고 나에게 외치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사무실을 꽤 번화가에 위치했다. 사무실 지하에는 최근 유행이라는 맛집 체인들을 모아 놓은 푸드코트도 있었다. 바로 옆 건물도 건너편 건물도 편의점이었다. 잔해 속에서 드문드문 건물의 형체를 알아볼 법한 것들이 눈에 걸리거나 발에 밟혔다. 운 좋게 아직 형체를 유지하는 식량이나 물병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창고에 쌓여있는 채로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편의점 간판. 그것만 찾아도 당분간은 살만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너무 멀지 않은 거리 내에서 무너져 내린 도시의 잔해들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책상, 의자, 가전 등의 여기가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던 공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것들도 어쩌다 한 번씩 눈에 띄었다. 그 잔해들 사이에는 간간히 죽은 사람의 잔해도 보였지만, 계속 보다 보니 그것조차 결국 익숙해졌다. 아니다. 익숙해졌다기보다는, 모르는 척하기 시작했다는 게 맞았다. 이 세상에선 오히려 살아남은 내가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건물 조각들을 뒤적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도 낮이 더웠다. 지쳐 있던 나는 점점 눈앞이 어질 거렸다. 이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드디어 잔해 속에서 흙먼지에 뒤덮인 생수 한 병을 발견했다. 나는 병을 손에 쥐었다. 병뚜껑을 돌려보니 새 것인 모양이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병을 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물을 들이켜다 손에 든 병의 무게가 줄어든 게 느껴질 때 즈음 화들짝 병에서 입을 뗐다. 500mL 생수 한 병은 생각만큼 많은 양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또 언제 물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단 삼 분의 일 가량 남은 물은 나중을 위해 보관하기로 했다. 먼지는 잔뜩 묻었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고 매달려있던 출근용 크로스백에 물통을 집어넣었다.
150mL 남짓한 물, 신용카드와 신분증이 든 카드 지갑, 최신 무선 이어폰, 얇고 기다란 수첩과 볼펜 한 자루, 배터리가 55%가량 남은 스마트폰. 평소 외출할 때면 가방 속에 필수품으로 들고 다니던 것들이었다. 언제 어디를 갈 때나 필기구를 챙겨 다니는 나를 보며 친구는 요즘 같은 세상에 폰에 메모를 하면 되지 가방 무겁게 이걸 왜 들고 다니냐고 말하곤 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필기구는 정말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하나같이 쓸모가 없었다. 담배라도 안 끊을걸. 그랬으면 라이터로 불이라도 켤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담배라도 한 대 태우는 동안 이 모든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났을지도. 이럴 때 맥가이버칼은 정말 유용했을까. 80년대 영화에서나 나오던 촌스러운 아이템이라 생각했는데, 맥가이버칼이 진짜 답일 줄이야. 몸에 수분이 들어가자 아까보다는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지 다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물을 발견한 곳 주변을 조금 더 살펴보았지만 먹을만한 것이나 마실만한 것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 좀 더 시야를 넓혀 물이 발견된 곳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을 마시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상황은 없었다. 대체 난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따위의 생각이 여전히 머리를 스쳤지만 지금은 진지하게 그런 걸 생각해볼 때가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찾아야 하는 걸까. 아직도 움직여야 한다. 세상은 멸망했지만 일단 나는 살아있고, 그러니까 다시 살아야 했다.
회사는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남단에 있었다. 강 주변으로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건물은 거의 없었고 나무와 군데군데 설치된 편의점만 있을 뿐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나 여름밤이면 도시의 사람들은 강변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곤 했다. 그쪽은 무너질 것들이 덜하니 여기보단 낫지 않을까. 어쩌면 편의점 물건들도 꽤 많이 보존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마실 수 있을진 모르지만 강물도 있다. 스마트폰을 꺼내 나침반 앱을 켰다. 도시의 동서남북은 무의미해졌을지 몰라도 지구가 아직 이렇게 존재하는 이상 나침반은 여전히 유효했다. 회사에서 한강까지 8km 정도였으니 부지런히 걸으면 해가 지기 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북쪽으로만 가보자.
어디가 어딘지, 얼마나 이동했는지도 모른 채 아픈 다리를 겨우 이끌고 북쪽으로 계속 향했다. 건물의 콘크리트 더미와 잔해 여기저기 박힌 쇳조각 같은 것들에 치여 나머지 한쪽 다리마저 조금씩 아려왔다. 이 판단이 맞는 건지, 맞게 갔다고 한들 지형이 변하진 않았을지 아무것도 보장된 건 없었다. 그래도 계속 가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이게 다니까.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게 느껴질수록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세상이 망해서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세상만 망하고 내일은 왔다. 어쩌면 세상도 망하고 모두의 시간도 멈췄는데 나만 계속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망한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맞이하고, 내일 또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멀쩡하던 세상보다 망한 이 세상에서 나는 더 악착같이 삶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기분이다.
스마트폰을 꺼내보니 2시간가량이 지나있었다. 다시 갈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참아야 할까, 어차피 망한 세상 그냥 마셔버릴까. 머릿속은 온통 그 고민뿐이다. 그때, 나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의 인기척이 어둠에 잠긴 이 고요한 세상에서 희미하게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임을 멈춘 채 귀를 기울여보았다. 분명 내가 낸 소리가 아니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고, 쇠로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언뜻 죽어가는 어느 말 못 하는 짐승의 외마디 비명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이 인기척을 반가워해야 할 것인지 겁내야 할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가방 속 물병을 꽉 쥐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향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잔해에 가려 보이지 않던 풍경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잔해 속에서 무언가 사람 같은 게 움직이고 있었다.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 이제 나도 죽을 타이밍인 걸까. 가늘게 실눈을 뜨고 초점을 맞춰보려 애썼다. 그건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발씩 한 발씩 가까이 가자 형체는 더 선명해졌다. 무언가 사람 같은 것, 그것은 정말 사람이었다. 콘크리트 더미 속을 하나씩 헤치며 밑에 깔린 무언가를 줍고 있던 그 사람 역시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둘은 몇 초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애도 지금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있는 걸까.
“사람이에요?”
내가 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쪽에서 날 향해 던진 질문이었다. 10대일까. 아직 어려 보이는 그 남자는 나만큼이나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내게 남자는 작은 돌을 집어던지며 다시 외쳤다.
“사람이냐고!”
“사람! 사람 맞아요!”
작은 돌은 마치 내가 진짜 사람인 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는 듯 내 팔뚝을 맞고 또르르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갑자기 내 쪽으로 엉엉 울며 달려왔다.
“아저씨, 우리 이제 어떡해요.”
현-희-효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