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한 기억에 의존하는 증인 진술
미국의 산재사건에서 보험사가 첫 번째로 던지는 질문은 “이 사고가 일과 관계된 것인가?”입니다. 언뜻 보기에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사건의 성립을 좌우하는 매우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청구인은 근로 중 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었다고 클레임 한 것이지만, 보험사가 만약 다른 증거를 갖고 있을 경우, 보험사는 그 클레임을 즉각 거절하고, 사건은 재판에 부쳐집니다. 재판에서 판사는 청구인과 보험사 쪽 증인(대개, 직장의 사장이나 HR 담당자, 혹은 직장 동료), 양쪽의 증언을 모두 듣고, 양쪽의 증언이 일치하는가를 기준으로 청구인 쪽 클레임의 진실성을 판단합니다. 판사가 청구인과 보험사 쪽 증인에게 하는 질문은 (1) 고용 관계가 있었는지? (2) 사고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3) 사고가 난 것을 회사에서 알고 있었는지? 등 사실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양쪽의 증언이 일치할 경우, 판사는 청구인의 클레임이 진실하다고 판단하고 직무 관련 사고로 인정하지만, 양쪽의 증언이 불일치할 경우, 판사는 청구인의 클레임이 진실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클레임을 기각합니다.
판사가 던지는 위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청구인과 보험사 쪽 증인의 증언이 쉽게 일치할 것으로 독자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재판을 경험해본 결과, 의외로 청구인과 보험사 쪽 증인의 증언이 불일치하여 케이스가 기각되는 경우가 상당수 있습니다. 양자의 증언은 모두 그분들의 ‘기억’에 의존합니다. 증언이 불일치한다는 것은 결국, 양자의 기억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저는 ‘기억’의 문제에 대해 많은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인지심리학자 나이서 교수의 기억 실험이 유명한데, 저의 학문적 탐구에 시사하는 바가 커서 독자 여러분께도 소개해 드립니다.
1986년 NASA는 유인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를 지구 밖 궤도로 발사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는 당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무중력 공간에서 과학 수업을 진행할 민간인 교사를 우주에 보내는 ‘우주 교사 프로젝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1,000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여성 민간인으로는 최초로 현직 교사 ‘크리스타 메콜리프’가 선발되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1986년 1월 28일, 챌린저호는 4차례의 연기 끝에 드디어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었지만, 발사 73초 만에 전 미국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중 폭발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 날, 나이서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106명의 코넬대학교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눠 주고는, “참사 전날 누구와 어디서 폭발 소식을 접했는지,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그러고 나서 뭘 했는지”를 상세히 적게 했습니다.
나이서 교수는 이 기록을 잘 보관해 두었다가, 정확히 2년 반 후 106명의 학생들을 다시 불러서 똑같은 질문으로 개별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그 답변을 과거에 작성했던 진술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학생들의 25퍼센트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문지에는 “친구와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미식축구를 보다가 뉴스 속보에서 소식을 접했다”라고 썼는데, 2년 반 후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라디오로 소식을 들었다.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책 위로 눈물을 떨구었다”처럼 엉뚱한 기억으로 회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2년 반 전의 진술과 비슷하게라도 기억하는 사람의 수는 10퍼센트를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나이서 교수는 부정확한 기억을 갖고 있는 90퍼센트의 피험자들에게 본인들이 2년 반 전 설문지에 직접 적은 진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걸 보니 제 글씨가 확실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맞아요.”라고 억지 주장을 펼쳤습니다. 거부하기 힘든 객관적 증거를 들이밀어도 자기 머릿속 기억이 더 맞다고 확신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는 기억이 오래 남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나이서 교수의 기억 실험은 우리가 철떡 같이 믿고 있는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부실하며 쉽게 왜곡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미국 산재 상해보험 시스템은 이렇게 왜곡이 심한 기억에 의존하여 판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실관계에 관한 청구인의 기억이 비록 정확했다 하더라도, 보험사 쪽 증인이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면, 판사는 청구인의 클레임이 진실하지 않다고 판결하고 케이스를 기각합니다. 저에게도 이러한 증인 간 증언 불일치로 기각된 케이스가 3개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사고를 당한 청구인이 사고가 일어난 직후 간단한 ‘사고 기록’을 작성하여 바로 회사에 제출할 것을 권유합니다. “내가 몇 월 몇 일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떻게 사고가 났고, 그 사실을 몇 월 몇 일 회사의 아무개에게 알렸음.”을 문서화해 놓는다면, 그리고 그 문서를 회사에 제출해 놓는다면, 청구인 스스로의 기억 왜곡 현상을 피해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왜곡된 기억으로 증언할 보험사 쪽 증인의 증언을 극복할 증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