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임상 및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며,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과학적,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훈련을 받았다. 프로이트, 융, 로저스와 같은 거장들의 이론부터 인지행동치료 (CBT) 그리고 최신 뇌과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식은 엄격한 가설 검증과 통계적 재현 가능성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녹현 이세진 선생을 통해 잠시 접하게 된 사주명리학은 나에게 하나의 학문적 도전이자 흥미로운 모순이었다. 물, 불, 나무, 금속, 흙이라는 오행(五行)의 성질과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성격과 운명을 읽어내려는 이 체계는, 내가 익숙했던 정통 심리학의 경험주의적 접근과는 완전히 다른 궤도에 놓여 있었다. 역학의 대가를 통해 몇 개월간 그 난해한 체계를 익히려 노력했지만,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머릿속에서는 좀처럼 명쾌한 논리적 틀이 잡히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처럼 두 학문이 대치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은 '데이터'와 '검증 가능성'의 문제에서 발생한다. 사주명리학은 태어난 연·월·일·시, 즉 사주팔자(四柱八字)라는 네 가지 기둥에 근거하여 한 사람의 운명을 풀어낸다. 그러나 나는 늘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과연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기준으로 인간의 삶을 점칠 수 있을까? 사주는 그 기저부터 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하기 어렵다. 표준시 개념이 희박했고 시계가 귀했던 과거, 한 개인의 출생 시간을 분 단위로 정확히 기록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결국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구축된 체계라면, 그 해석과 결과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른다.
더 나아가 사주가 '수천 년간의 경험적 데이터'를 근거로 한다고 주장할 때, 심리학자는 통계학적 재현 가능성을 요구하게 된다. 이 경험적 축적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수집되고 검증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메커니즘이 부재하다. 만약 특정 사주 구조를 가진 1,000명의 운명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반복 재현할 수 있다면, 이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사주명리학의 경험은 개인의 해석과 비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며, 객관적이고 공개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이는 경험은 될 수 있을지언정,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이나 통계학이라 부르기는 어렵게 만든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손바닥에 ‘왕’자를 새기면서 대통령을 꿈꾸었다는 얘기는 이제 하나의 전설로 남을 듯하다. 이처럼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는 이들조차 비과학적일 수 있는 동양의 지혜 체계에서 상징적 의미나 위안을 찾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비과학적 접근이라는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사주명리학이 지닌 본질적 가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사주는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 속에서 인간에게 심리적인 위안과 자기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사주가 ‘예언’의 기능을 넘어 ‘상담 도구’로서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다. 사람들은 사주를 통해 자신의 타고난 성향(오행의 강약 등)을 객관화하여 돌아보고, 자신이 겪는 삶의 굴곡을 ‘운명의 흐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한다.
정통 심리학의 언어로 본다면, 사주는 일종의 강력한 ‘투사적 검사(Projective Test)’이자 ‘자기 이해를 위한 내러티브 틀(Narrative Framework)’로 기능하는 것 같다. 사주 해석을 들으며 "나는 원래 이런 성향을 타고났구나"라고 수용하는 과정은, 마치 MBTI나 혈액형별 성격진단과 같은 성격 유형 검사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더 잘 비추어주는 거울로서 사주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사주는 운명에 대한 '설명(Explanation)'을 제공하는 대신, 삶의 의미와 고난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을 제공하며, 이 해석을 통해 사람들은 삶의 주체성을 되찾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적, 영적인 영역에서 사주명리학은 여전히 살아있는 동양의 지혜 체계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