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 교회에 도착해 예배당으로 들어서는데, 한 집사님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박희철 집사님은 하늘을 날아다니시나 봐요? 운동화가 너무 깨끗해서요!”
그 말에 나도 웃으며 대꾸했지만, 머릿속은 묘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 집사님은 깨끗한 운동화를 보며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결론을 농담처럼 내렸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이 방식의 추론은 사실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이를 **가추법(Abduction)**이라고 부른다. 귀납도, 연역도 아닌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가추법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연역법과 귀납법은 익숙하다. 연역법은 전제가 참일 때, 반드시 참인 결론을 도출한다. 귀납법은 반복되는 사례를 통해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가추법은 관찰된 현상에 대해 가장 그럴듯한 원인을 상상하여 추론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를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집사님의 농담이 바로 이 방식이다. “운동화가 매우 깨끗하다.” → “그 이유는 땅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늘을 날아다닌 것이 아닐까?”
논리적으로 참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럴듯하다. 그러니 우리는 웃는다.
사실 난 그 운동화를 오직 교회 갈 때만 신는다. 게다가 대중교통도 아닌 차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운동화가 더러워질 일이 거의 없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어젯밤, 운동화를 깨끗하게 세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며칠 전에 같은 디자인의 새 운동화를 하나 더 샀을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은 다양한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가추법은 바로 그 ‘가능성들 사이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하나’를 고르는 일이다. 그 설득력은 상황, 맥락, 상식, 직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매일 가추한다. 놀랍게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추법을 사용한다.
“아내가 오늘따라 말이 없네.” →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톡을 보낸지 오래인데 답문이 늦네.” → (내가 보낸 내용이 불편했나?)
“아이 표정이 어두워.” →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이처럼 우리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 앞에서, 스스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만든다. 그 추론은 때론 옳고, 때론 틀리지만, 우리의 이해와 판단, 관계와 감정은 이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가추법은 과학의 영역에서도 중요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늘 상대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의도를 추론하고 해석한다.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비약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며,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모든 깨끗한 운동화가 하늘을 날아다닌 결과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다양하고, 추론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철학자 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Abduction is the only logical operation that introduces any new idea. ("모든 새로운 지식의 생산은 오로지 가추법에 의해서 이뤄진다.")
— Charles S. Peir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