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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im Apr 24. 2023

추억은 증거다

가슴에 남는 추억

3주 전인가 동생부부 우리 부부가 가족동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아틀랜타에 막 도착했을 때

“카톡”문자가 울렸다 카톡창을 열고 확인하려 할 때 눈에 띄는 알고리즘 “김 권사님 천국행소망기도 ”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 알 수 없는  멍한 바람이 불었다. 오늘까지도 마음이 우울하고 먹먹한 슬픔이 남아있다


짧은 머리에  누가짜준것같은 반짝이 실이 들어 있는 형형색색의 비니를 색상별로 쓰셨던 분

나중에서야 알았었지만 암선고를  받았고 세러피를 받으셔서 머리가 없어 따님이 한 올 한 올 곱게 엄마를 위해 짜서 보내준 거라는 걸…


첨 그분을 뵈었던 건 10년이 훨씬  지났던 막 플로리다에 왔을 때이다

아직은  플로리다라는 곳에 남편의  발령이 못 마땅했던 그러나 난 한국인이고 미국에서 한국 생활을 하려면 필수코스

한국마켓을 알아둬야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어  남편과 구글로 찾아 어느 빌딩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마켓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라색인지 옅은  브라운색이었는지  개량한복차림에 단아한  모습을 한 여성분이 야채 앞에서 문 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데

하얀 피부에 입가에 미소가 머물러 보조개까지 이쁜 나이 든 여성분이셨다

 

가게 여기저기를 둘러볼 때“한국분이세요?”라며 수줍게 말을 걸어오셨던 김권사님 난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네 ”하고 인사를 건넸다

어디서 오셨냐, 한국에서는  어디서 사셨냐 등등 일상적이지만 친절과 배려가 묻어있는 물음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경계심이 많던 나를

무장해제시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과 수다를 즐기게 만든 분이었다

미국생활이라는 것이 단촐하고  외로우니 교회에 나와 어울리면 타국생활이 덜 힘들다며  교회위치를 알려주셨고 나는 이삿짐을 풀고

몇 주 후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나라말과 같은 문화를 가졌다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 행동을 하지 않기에

교회의 상황은 상식에서  벗어난 보편적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교회를 안나간지가 3년이 넘어가고

나를  그곳으로 오라 했던 김권사님은  가끔 내 집 앞이 직접 만든 찹쌀떡을 놓고 가시거나 오이와 할라피뇨고추가 동동 뜬 물김치를 문 앞에

메모와 함께 놓고 가시는 일들이 종종 있으셨다. 한국에 있을 땐 일상적으로 먹던 먹거리도 땅과 토양이  다른 야채로 그 맛을 내기란 여간힘 든 게 아니었는데

오랜 미국생활의 노하우셨는지 나는 상상도 못 할  길거리 꽈배기나 찹쌀떡 물김치를 맛깔스럽게 해서 가련히 문 앞에 놔두시고 가셨던 김권사님


물김치와 음식을 직접 해서 주셨다는 그 고마움을  한 끼 식사대접으로 답하기 위해 그분과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던  그날

“비니가 잘 어울리세요”라는 말에 “내가 암투병한 지 몇 년 됐어요. 딸들이랑 남편이 내 완쾌를 기도하며 짜준 비니예요, 머리가 다 빠져서 … 항암 때문에”라며

어려운 말을 담담하게 하시며 “이젠 다 끝난 지 5년 됐어요. 그래도 3주에 한 번씩 검사는 받아 근데 이 비니를 사람들이 다 이쁘다 하네. 나도 좋고. 라며 미소

와 함께 답하셨다. 김권사님의 말끝에..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했다면 엄마도 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며 나도 가족이 항암을

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안다는 말을 해드렸었다

엄마가 담낭암선고를 받고 9개월 만에 하늘로 가셨었다. 암중에 가장 고약하고 치료가 힘든 게 췌장암과 담낭암이라는 의사의 말이 아직도 내 속에 남아있었고

그 슬픔이 어떤 건지도 난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 기족의 마음을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난 손을 꼭!!! 잡아드렸고 “ 기도할게요 ”라는 내 말에

김권사님은 고맙다며 웃음을 보여 주셨었는데  그 후 서로 시간도 , 생활도 바쁘다 보니 연락이 뜸해졌었다


헌데 잘 계시겠지, 생각했던 나의 바람과 달리  영면하셨다는 톡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태어날 때와 하늘로 가는 그 순간까지  모든 걸 권장하는 건 하늘에 뜻이리라

그 시간을 살아내고 견디고 채워가는 건 살아있고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일 거고. 허나,이 세상에 내가 있었다는 증거는

유명해져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과 달리 , 우리처럼 보통의 생을 살다 간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작은 추억이라도 두고

순간순간 그들이 내가 있었음을 생각해 주는 건 아닐는지. 죽은 사람이야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장 슬프고 두려운 순간은

죽음이 아니라 잊히는 그 순간이라는 걸 난 엄마의 죽음을 통해 아빠의 죽음을 통해 기억하고 예습했었다

살고자 하는 강한 열망보다 살아가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추억을 사람들에게 남기고 그 시간들을 느낌들을  공유했는지가

내가 살다 간 시간의 흔적이 될 것이고 내가 살았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니까…. 내가 김권사님을 기억하고 있고 그분이 만들어 주었던 찹쌀떡을 추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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