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아빠에게 맞으며 자란 나에게는 코끼리 다릿줄처럼 알 수 없는 공포로 얼굴을 보면 단 한마디도
말대꾸조차 못하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빠와 팔짱도 끼고 싶었고 아빠와 수다도 떨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용기도 없었고 아빠를 대하는 방법은
나에게는 어려운 문제였다 아빠의 사랑은 아니어도 조금의 관심만 나에게 주었더라도 이화여대에 갈 수 있을 만큼
운동을 잘하는 선수였는데 어느 날 새벽 아침 일찍 운동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내게 엄마는 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주고 있었고 그때 아빠가 안방문을 열고 나오며
“지기배가 무슨 운동을 한다고 지랄이야, 뭐 하러 아침에 저 가시나 한대 돈 줘 미친년아!!
라며 엄마에게 육두문자로 욕을 하는 모습은 “아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였나”
라는 자책감마저 가지게 했다. 그 일이 있었던 게 중3 때초반이었고 난 운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늘 사랑을 주는 엄마 힘든 집안 살림이라도 자식들에게는 뭔가를 해주려 애쓰던 엄마에게
나로 인해 듣지 말아도 될 말을 듣게 한 죄책감이 운동장에서 나를 끌어내렸고 사춘기의 나에게는
내 말을 귀담아 들어줄 누구도 곁에 있지 않았다. 잦은 이사로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조차 없던 나
한동네에서 오래 머물러 살아야 찬구도 만들고 추억도 만들 수 있었을 덴데 우리 가족은 한동네에 5년을 머물러 산적이 없을 정도로
이사를 많이 다녔기에 나에게는 내 마음의 짐을 나누어지고 들어줄 그런 친구가 없었다
오로지 나의 친구는 공책에 끄적거리는 낙서. 그림 글이 나에 위로였고 위안이 되는 친구였다
난 딸 셋의 장녀다. 아빠는 장손에 종손이었고 그 시대에 장손에 종손은 아들이 있어야 했고
장녀는 아무 쓸모없는 집안에 골칫거리 같은 존재였다. 내 성격이 어떠든 어떤 인성을 가졌던 마음이 따뜻하던
정이많든 아빠에게는 난 그냥 대도 잇지 못하는 시집가면 남의 집사람이나 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다고 내가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도 아니어서 , 반에 육십 명 남짓한 아이들 중 성적도
중간정도인 그저 평범한 아이였어서 , 나라는 존재는 무엇을 좋아하던 무얼 하던 아빠에게는 관심밖에
인물이었을 뿐이다
부모가 부모로 성장되는 교육을 받으며 자식을 낳은 게 아니듯 자식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야지 하는
결심을 하고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인지라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나 아이를 나은 부모는 아이를 위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건 요새 사람들은 누구나다 알고 있지만
내가 살아왔던 시대는 먹고살기가 힘든 시대였다고 아빠를 이제야 조금 이해하고 있으나
어린 나이에 나에게 아빠를 이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벽에 던져졌다는 기억을 하고 있다는 건 아이에게 얼마나 부딪혔던 순간의 기억이 강렬하고
두려운 공포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커다란 손이 자신을 들어 올려 부딪혔었던 그 일이 돌 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감정은 상상의 범위를 벗어 나는 잔인한 일인 거다
기억이 잊으려 한다고 잊히는 게 아니고 원망이 상대방입장을 이해한다해서 희석이 되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고 보면 아빠와의 일들은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순간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으로
미움으로 두꺼운 마음에 철창을 만들어갔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학대영상을 보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살을 떨리게 하고 그런 영상을 보고 나면 심하게 며칠을 마음 둘 곳 없이 허전하게 힘들었다
아빠도 세월은 피할 수 없었고 나이를 드셨지만. 아빠와 거리는 세월이 흐른다고 좁혀지지 않았다
예전보다는 따뜻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고 손을 잡아주기도 한 아빠 였지만 아빠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들을 감춘 체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십여 년 전 아빠가 폐암으로 쓰러지시고 엄마가 돌아가 시 전 아빠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과 함께 엄마가
너한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던 일도 있고 해서 난 동생들과 번갈아가며 아빠 병원에서 간호를 했다
돌아가신 엄마의 당부도 당부였지만 나도 부모가 되고 보니 아빠의 심정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빠를 용서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유공자여서 국군 병원에 입원하셨고
호스티스병동에 우리 딸 셋 , 효녀로 소문 날 정도로 아빠를 정성껏 돌보았다. 나를 나아주셨다는 고마움이나
감사같은 애정이 있는 간호는 아니었고 아프신 노인에 대한 도리정도만 있는 간호. 아빠와 나눌 추억도 다정한 이야기도
없음을 아빠도 나도 알고 있었기에 우리 사이에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폐에 구멍이 뚫려 앉아서 밖에 잠들 수 없는 아빠라 침대머리는 고추세우고 앉아 잠이 든 아빠는
오래전 눈을 치켜 뜨고 나를 때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앙상한 그저 노인일 뿐이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걸을 수도 없고 환자용 변기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호흡이 짧아서
아빠는 지저귀를 차셨기에 용변을 보면 씻겨 드려야 했고 욕창이 생기지 않게 드라이바람으로 엉덩이를
꼭 말려야 했다
그렇게 아빠를 씻겨 드렸던 햇빛이 창으로 들던 어느 오후 곧 약 먹을 시간이라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좀 입맛에 맞게 차려 드리려 분주하던 나를 아빠가 부르셨다
“큰딸..”“이리 와 앉아봐 ”“
난 보호자용 간이 의자에 앉으며
“”왜요 어디 불편해요 “”라고 묻자
아빠는 팔을 길게 내밀고 손을 뻗으셨다 난 어리둥절했다
아빠는 조용히 나를 안아주면서
“”“내가 너한테 미안한 게 많다,”“미안하다 큰딸”“”
눈물이 하염없이 복받쳤다. 이 말을 난 43년 기다렸구나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아빠도 눈물이 고였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고통과 마추해야 하는 시간이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기억의 늪에서 말이다.
그 늪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상처를 준 사람의 한마디, 진심을 다 한 뉘우침의 외침
“”“미안해”“”이 한다어만 필요할 뿐이라는 걸 아빠를 통해 알았다
그렇게 며칠후 아빠는 돌아가셨고 아빠에게 평생품었던 원망도 백제화장터에서
아빠의 시신과함께 태웠고 ,논산선산에 한줌의 가루가 된 아빠를 날려드리며 내 인생절반
넘는 시간 가져왔던 아빠에 대해 느꼈었던 미움. 서러움.두려움도 같이 날려보냈다
~1편과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