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영희 Sep 06. 2021

결혼기념일

남편의 응급처치

  아침부터 무척이나 바빴다.

  은행을 들러 동사무소와 우체국의 일을 보고 나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부랴부랴 모임이 나가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그리움으로 지워진 시간을 되찾기에 찻잔에는 수다가 쌓여가고  있었다. 짓눌린 신명의 소리들이 허공에 흩뿌려지면서 웃음이 잠자리처럼 선회하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마주한 얼굴마다 간질거리는 봄빛처럼 환한 미소가 응축되어있었다. 모두는 모두를 향해 충전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해 질 녘이 되어서야 교회의 종소리가 울린 양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들어올 때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순댓국을 사서 들어왔다.

  '결혼기념일이 뭐 대수야. 그냥 저녁에 마주 보고 순댓국

한 그릇 먹으면 그뿐이지.'

   나이가 들고 보니 모든 것이  시큰둥 해졌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남편은 전화 한 통 없다. 두 번이나 전화했지만, 받지 않는다. 배가 고파 혼자라도 먹을 생각으로 대충 반찬을 챙기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 혹시 000  씨가 남편 되세요." 묻는다.

  " 네."

  내 말이 떨어 지기가 무섭게 지금 호흡 고란으로 병원에 실려 가고 있으니 그쪽으로 오란다. 갑자가 뇌가 없어진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챙긴 것은 핸드폰과 신발주머니였다. 왜 신발주머니를 챙겼는지 나도 모른다.

아마 핸드백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시간이 왜 그리 긴지.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병원에 도착하니 남편은 휠체어에 실려 응급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이미 얼굴은 부을 대로 부어있고 숨소리도 고르지 못했다. 의사의 지시 아래 간호사들의 응급처치가 이어지고 링거가 3개나 꽂히고 나서야 나는 남편 옆으로 갈 수가 있었다.

  한 시간의 긴 터널은 저러다 하나의 동상처럼 정물이 되어가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엄습해 왔으나 마주 본 남편의 겸연쩍어하는 웃음에 다 사라지고 방전된 몸은 말할 기력도 없었다.

  남편의 체질이 바뀌어 7년 전부터 고들빼기라는  나물을 조금만 먹어도 온몸이 부어오르고 심하면 호흡곤란까지 온다. 그래서 응급처치로 주사약까지 가지고 다니는데 그게 다 떨어져 손 쓸 방법이 없었단다.

  남편은 식당에서 나물이 나와 생각 없이 먹었는데 그게 고들빼기였단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 전만 해도 좋은 데 가서 저녁 식사하자고 해 놓고

  ' 벌 받아도 싸다 싸.'

  혼잣 말로 중얼거렸는데 들었는지 혹 나한테 하는 소리냐고 묻는다.

  " 이 방에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러면서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묻자

  "오늘은 말일이고 또 내가 병원에 실려  온 날이지."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저녁도 거르고, 남편이 병원에 실려 갖다는 말에 계단에서 넘어져 정강이는 까지고, 밤새 남편 옆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 오늘은 최악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어쩌면 주삿바늘 2개가 남편을 벌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되고 한편으론 이만하길 다행이다 감사의 마음이 교차한다.

  시간이 깊어질수록 잠은 오지 않고 피곤이 몰려왔다.

  공격적인 허탈감으로 오늘의 무게에 압살 당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남편 옆에 누워 가슴을 데워 주는 링거 하니 맞고 싶다.

  희미한 백열등이 휘장을 치고 나의 등을 다독이자 속살거리는 분노가 불빛 속에서 사그라지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