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지난 어느 봄날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수원 화성문 그림 그리기 대회가 있었다. 학급 대표로 그림을 그리게 된 딸아이와 나는 그림 도구를 챙겨 대회장으로 갔다.
벌써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3시간인데 2시간 동안 다 그렸다.
그림을 제출한 후에 집에 가려고 하는데, 딸아이의 친구 엄마가 차를 가져왔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엄마는 학원을 경영하는 엄마여서인지 아이들을 여러 명
태우고 왔다.
잠시 후 작은 봉고차 뒷좌석에 아이들을 태우고 나는 앞 조수석에 앉았다. 한참을 달려 아이들을 여기저기 아파트에 데려다주느라고 과속 방지턱도 몇 번 거쳤다. 그 때마다 나는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내렸다. 옆에서 운전하던 친구 엄마가
''왜 오줌 마려워요? 아이들도 거의 다 데려다주었는데 어디 화장실에 들렀다 갈까요.'' 하는 게 아닌가!
''괞찮아요. 그냥 가세요.''
사실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과속 방지턱에서는 엉덩이를 들어야 한다고 남편이 말하길래 그렇게 했던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차를 갓길에 세우더니 정신없이 웃는 게 아닌가!
''아니, 혜란이 엄마. 바보예요? 아니면 순진한 거예요.''
''남편이 그런다고 그 말을 믿어요? 나 참 자다가도 웃을 일이네.''그러면서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이 인간이 나를 3년 동안 속였어.''
나 참 몸무게가 좀 많이 나가는 죄로 이제껏 남편 차를 탔을 때, 과속 방지턱이 나오면 엉덩이를 힘껏 들었던 것이 억울하고 한심 했다.
''들어오기만 해 봐라. 내가 가만 두나.''
저녁때가 되어 출장 간 남편이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배탈이 났다고 하면서 숨 돌릴 틈도 없이 화장실로 직행했다.
한참 후에 나온 남편은 가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호두과자와
봉투를 내밀면서 출장비 남은 거라고 나에게 주었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호두과자와 돈봉투를 받아 들고 좋아했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그만 좋아하고 배탈이 나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면서 죽 좀 끓여 달라고 했다. 나는 압력밥솥을 이용해 잠깐 사이에 죽을 끓여 주었다. 죽을 먹은 남편은 피곤하니까 쉰다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 의자에 막 앉으려는데 낮에 있었던 일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마 내 정신 좀 봐.''
벌떡 일어나 따질 생각으로 안방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문을 여는 줄도 모르고 코를 골며
큰 대자로 누워 자는 게 아닌가! 깨워서 따지고 싶었으나,
출장에서 돌아와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속은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해.'
'손해 본 것도 아닌데.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나로 인해 그때마다 남편이 즐거웠다면 이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도 생각했다.
앞으로도 남편이 즐거워하면 속아 주리라. 똑똑한 바보는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생각하며 코를 고는 남편 옆에서 기분 좋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