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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Oct 20. 2022

나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  르 라보 상탈 33

가을과 겨울, 그 사이 어딘가의 기억

01 | 향수는 향수를 담고

우리는 경험 가능한 다양한 감각들로 기억을 보관한다. 같은 대상을 경험하더라도 관찰자에 따라 그것은 다르게 기억될 수 있는데, 오감 중 후각은 단연 이것에 가장 크게 관여한다. 같은 원두로 만든 커피는 역한 담뱃재의 향으로 기억될 때도, 또 깊은 풍미로 기억될 때도 있듯이. 그렇기에 우리는 후각을 통해서 특정한 기억을 상기해 추억에 잠기고는 한다. 당신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순간을 자세히 떠올려보길 바란다. 그때의 온도, 촉감, 그리고 향까지도. 만약 그 향을 담아낸 향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특별한 것. 나의 개인적인 추억을 향수로 담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큼 특별한 향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비싸고 아무리 좋은 향수라도. 


02 | LE LABO

오늘 사연의 주인공은 르 라보의 상탈 33이다. 르라보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전통적인 대량생산에 싫증을 느낀 프랑스 출신의 두 창립자 에디 로시(Eddie Roschi)와 파브리스 페노(Fabrice Penot)가 2006년 뉴욕에서 시작한 브랜드로 조향사가 그 자리에서 직접 향수를 블렌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숙성 기간 2주를 지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독특한 방식, 고객의 이름이나 원하는 문구를 향수 보틀에 적어주는 라벨링 서비스로 등장 초기부터 관심이 뜨거웠다. 특히 르 라보는 사용자마다 조금씩 발향되는 향이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더욱 나만의, 특별한 향수가 아닐까. 


03 |  SANTAL 33

그중 SANTAL 33은 르 라보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샌달우드, 버지니아 시더(삼나무), 카다몸, 바이올렛, 파피루스, 가죽, 앰버, 아이리스 노트를 띠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 향수를 뿌리면 우디 노트와 함께 마른 낙엽의 냄새, 그리고 가죽 냄새가 난다. 그리고 약간의 스모키함이 느껴지면서 단풍이 말라가듯이 낙엽의 단 냄새는 줄어드면서 점점 완전히 마른 낙엽의 냄새로 변하는 느낌이다. 달달하지만 드라이하면서 파우더리하고(텁텁한)고 따뜻한 느낌의 냄새지만 쓸쓸한 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04 |  MEMORY,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어딘가(사연)

뜨거운 햇빛과 시끄러운 매미 소리 때문에 정신없는 여름과 왜인지 모르게 아련한 첫눈과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싱숭생숭한 겨울 사이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은 아마 사계절 중 가장 차분한 계절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나에게는 아주 개인적인, 습관처럼 걷는 길이 있는데 르 라보의 상탈은 여름과 겨울 사이, 낙엽이 떨어진 가을의 그 길을 생각나게 한다. 거리에 떨어진 마른 낙엽 냄새, 어디서 붕어빵, 아니면 군고구마를 파는지 옅게 나는 연기 냄새, 그리고 다가오는 쌀쌀한 겨울 냄새.

나에게는 거의 1년 365일 매일 걸었던 길이 있다. 역에서부터 집까지 길게 쭉 늘어진 길인데 별로 특별할 것은 없는, 그냥 그런 길이다. 지금은 옛날처럼 자주 이 길을 다니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거의 3년 내내 매일 걸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갈 때,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갈 때, 피시방을 갈 때, 아니면 굳이 별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비가 오늘 날도, 정말 더운 날도, 정말 발이 얼 것 같은 날도, 거의 항상 걸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 이 길을 걷다 보니 길에 떨어진 낙엽들이 쌓여가듯 나의 추억이 되어 이 길에 쌓여갔다. 특히 가을과 겨울 사이에 기억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가장 행복했을 때도, 힘들었을 때도 그때였기에.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특별히 비싼 식당을 가거나 무엇을 하지 않아도 학원 끝나고 친구랑 같이 얘기하면서 독서실을 가는 것에, 배가 고파 독서실 가는 길에 먹었던 닭꼬치 하나에, 독서실에 친구가 준 ABC 초콜릿 하나에 행복했었다. 지금 호텔에서 근사한 끼니를 먹어도, 비싼 돈을 내고 호텔을 가도 그때만큼 순수하게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직도 선선한 가을 날씨에 학원이 끝나고 독서실로 가던 길의 밤공기와, 붕어빵을 팔던 트럭에서 나던 냄새, 낙엽 냄새와 낙엽을 밟는 소리들이 선명하다. 그렇기에 가끔씩 이 길을 걸을 때면 그때의 기억들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행복했던 옛 기억이 떠올를 때면 이제 막 물든 단풍잎처럼 달달함이 느껴지다가도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는 생각에 마른 낙엽 잎처럼 쌉싸름함과 텁텁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르 라보의 상탈은 정말 이 길과 닮아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르 라보는 말보로의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 미 서부 초원을 생각하고 만들었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미 서부 초원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나의 기억 속에 이 길이, 이 길에서 맡았던 말라가던 단풍의 냄새와 붕어빵을 파는 트럭에서 나던 연기 냄새, 겨울이 다가오는지 쌀쌀해진 밤공기의 냄새들이 너무도 상탈의 향기와 닮아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그런 냄새.  그렇기에 상탈은 나에게 향수(Nostalgia)이자 향수(Fragrance)이다.

05 | 마치면서 

항상 느끼지만 과거에 갇혀 사는 건 좋지 않다. 좋았던 기억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좋지 못했던 기억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다음번에 그러지 않을 정도로 남겨두자. 그러면 날이 서있던 힘들었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 점점 무뎌지고 미화되어서 가슴 한편에 추억이 될 것이고 너무 그리울 것만 같았던 빛이 났던 좋은 기억은 점점 빛을 일어 가슴 한편에 은은한 조명으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망각이 있기에 추억도 있는 것이지 않을까.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억한다면 좋았던 기억은 너무 그리울 것이고 좋지 못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너무 고통스러울 것이니.


*향수와 관련된 사연이 있으시다면 dhkim77000@gmail.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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