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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속 교과서

아버지의 집

by 화우


아궁이 속 교과서


사춘기 시절, 나에게 엄마는 한없이 다정했고
아버지는 무섭고, 불합리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시골 부모님 곁에서 지냈고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분은 늘 화가 나 있었고, 말끝마다 뾰족했다.

아버지는 여섯 살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아들처럼 자라셨다고 했다.
누나가 둘, 남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남동생은 6·25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혼자 남은 작은어머니는 야반도주하듯 떠나
어느새 재혼해버리셨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일곱 남매의 막내였다.
형제들은 제각기 저마다의 삶을 살고 있었다.

큰언니는 전파사를 하는 형부와 결혼해
아이 셋을 낳고 성실히 살고 있었고,
큰오빠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K-장남으로서 역할을 하며
부산에서 새언니와 맞벌이를 하고 있었다.

둘째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었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합격 소식은 없었다.

셋째 언니는 공부를 잘해 대구로 유학을 갔지만,

어느 날 정신질환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 일은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바로 위 오빠는 대구에서 공고를 나와 우체국에 다니고 있었다.

이 많은 가족사를 줄줄이 풀어놓는 건,
그 시절 아버지의 ‘뾰족함’과
내 사춘기 반항이 왜 충돌했는지 이야기해보고 싶어서다.

아버지는 땅과 소를 팔아가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셨다.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아들은 백수였고
유학 보낸 딸은 정신질환을 안고 돌아왔다.

그러니 공부하겠다는 나도,
딱히 반갑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라도 틀린 것이 있으면 꼭 따졌고
맞서 말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분노와 고단함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

그날이 무슨 날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아버지와 나는 심하게 다투었고
아버지는 내 교과서를 아궁이에 쑤셔 넣으셨다.

“불쏘시개로나 쓰자.”

나는 울었다.

화가 났고, 무서웠고,
무엇보다 교과서가 타버릴까봐 걱정되었다.

타버리기 전에 얼른 꺼냈고, 재를 툭툭 털어내며
책을 꼭 끌어안았다.

그런 일은 한 번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 교과서는
늘 구겨져 있었고,
나는 늘 그 집을 떠나고 싶었다.


아버지의 집


우편번호 745-872
한우물길 78-7
그 마을엔 가장 초라한 집이 하나 있다.

여름이면 토란잎이 무성하던 집 뒤꼍,
지금은 뿌리 깊은 잡초들만 가득하다.

내일 논에 넣을 짚더미 사이
외양간에서 나던 케케한 거름 냄새도
이젠 더는 나지 않는다.

소죽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피던 가마솥 아래,
아궁이의 불은 꺼졌다.

눈 내리는 밤,
당신의 자전거 소리에
이불 속으로 숨어버리던 아이도
이젠 더 이상 없다.

앞논에서 뽑아 리어카에 실었던 배추는
말라비틀어진 채로 남아 있다.

리어카를 끌던 늙은 아내도,
등록금을 보채던 어린 자식도
모두 한우물 숲 시냇물 따라
머얼리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 집 헛간엔
뿌리 잘린 잡초들만
남아 있다.


2017년 8월 16일 작 / 브런치 게재


이 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 집에 다녀와서 쓴 글이다.


아버지의 말


이제야 돌아보게 된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지나
가난과 새마을 운동의 틈바구니에서 온 마음 다해
자식 교육에 힘을 쏟은 사람.

그러나 돌아온 것은
허무한 마음뿐이었겠지.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내 책을 정말 불 속에 던진 적이 없었다.

그건,
감정을 참지 못한 하나의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삶에 대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도 무언가를 쓰려는 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다간
그분에 대한 연민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안에 아직도 역사책 처럼 살다간
아버지의 말이 남아 있다.


“나는 하도 배고프게 살아서 자식 낳으면
배만 부르게 해 주면 되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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