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엉킨 잡초로 자라더라도, 기억만으로도 슬픔과 피할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이 야기되더라도, 내가 붙잡아야 할 그 씨앗들의 내부에는 세계가 담겨있다' 대니 사피로의 stilling writing (65쪽)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 하교 길 옆에 피어있는 서정주 님의 국화꽃보다 훨씬 작고 볼품없는 노란색 들국화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지금의 계절처럼 춥고 으스름한 계절에 잎이 말라가면서까지 피어있는 진한 들국화 향에 취해서 몽롱해진 나는 꼭 이 들국화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하굣길 폐시멘트 공장 위로 줄지어 피어 있는 꽃을 사냥해서 집에 꽂아 두기도 하고, 책 속에 가두어 영원한 향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를 맡으면 나도 마치 그 추위 속의 들국화 같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 있는 듯 해 두 눈을 감았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가 작가라면 자신의 역사적 토대 없이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중략~
이는 내가 이 씨앗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내면의 장소들을 통과해 왔다는 의미다. 이 씨앗 들은 너무나 작고 항상 찾아내기 어렵다.' 대니 사피로의 stilling writing (64~65쪽)
십 대 시절 나는 출세한 작은 오빠와 평범한 삶을 사는 나의 ㄷㄱ언니를 간절히 소망하며,
다정 다감하고 화내지 않는 아버지를 원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했다.
사십(그 당시는 33)이 되도록 사범 시험을 공부하는 실패한 인생처럼 보이는 백수오빠, 밤새도록 잠 못 이루고 환청과 환시에 흔들리는 언니, 그로 인해 화나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다정하고 맘씨 고운 엄마가 있었고, 참빗으로 어린 나의 머리를 빗겨 주던 큰 오빠도 있었다. 나의 부모가 살아가며 맞이한 행복한 삶도 불행했던 삶도 모두 나도 같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내 내면을 통과한 씨앗들로 자랐고, 그 씨앗들이 어쩌면 나에게 초겨울에도 국화 향기가 나게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하며 오십 대 나는 눈을 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