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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에게는 눈치가 없다

by 화우

가을비에게 눈치가 없다


눈치 없는 가을비가 오늘도 내린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가 가을밤 내내 창문을 두드린다.
귀뚜라미는 소낙비에 숨죽이고, 여름인지 가을인지 헷갈려한다.


하루가 다르게 깊어가야 할 계절이, 아직도 방향을 잡지 못한 듯하다.

릴케는 가을날이란 시에서 남쪽의 날들을 더 주시어
마지막 과일들이 완숙으로 익게 해 달라 기도했지만,
이 비는 그런 기도를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해인 수녀님 역시 며칠만 더 햇살을 주시어
들판의 곡식이 여물게 해달라 했건만,
가을비는 오늘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을 적신다.


익어야 할 때에 쏟아지는 비는 늘 사람 마음을 뒤흔든다.
무르익지 못한 곡식처럼, 나 또한 무언가 미완인 채 서 있는 것 같다.
다 이루지 못한 일들이 빗줄기 사이로 스쳐 지나가고,
나는 멍하니 비를 바라본다.


언제쯤 가을의 햇살이 환한 얼굴로 떠올라
세상과 나를 부드럽게 감싸줄까.
그 햇살이 오면, 비에 젖은 곡식도
조용히 익어가리라 믿으며 오늘을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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