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반지를 팔았다 2]
며칠 전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브런치 글 중 소위님의 '엄마의 반지를 팔았다'를 읽었다.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짜고 짠 눈물만 내 입으로 들어갔다.
중학교 1학년 때 쯤 한 여름 비가 내리는 어느날이였다.
우리집 뒤안 토란위로 소낙비가 큰구슬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농사일을 하시다가 소낙비로 엄마가 툇마루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엄마를 꼭 껴안고 땀냄새와 흙냄새을 맡았다. 남루한 그녀에게는 한우물[고향마을 이름]숲에서 소낙비가 떨어질 때 내음이 났다.
14살짜리 소녀는 엄마를 꼭 껴안고 엄마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다 죽는 것이니 엄마도 언젠가 죽어 이별하게 된다면 나는 꼭 그녀를 따라 같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19살의 겨울 방학 되는 때 그녀를 떠났다. 부산 오빠집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그 때 엄마는 자신의 반지를 빼 주시면서 어려울 때 팔아서 써라고 하셨다.
그것을 나는 예쁘게 세팅해서 끼고 다녔다. 오빠집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언니랑 오빠는 맛벌이 부부였고 그 때 금방 태어난 조카랑 3살짜리 조카딸이 있었다. 그애들을 돌봐주면서 오빠로 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더구나 촌에서 올라온 촌년으로 학교 생활도 적응하지 못했고 공부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때아닌 사춘기를 맞았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 때가 다되도록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업준비를 했지만 공무원시험, 공사시험에서도 다 떨어지고, 전공공부도 재대로 안해서 많이 힘이 들었다.
그 때 나는 오빠에게도 미안해 차비조차 없었지만 말하지 못했다.그리고는 반지를 학교앞에 있는 금방에서 칠만원을 받고 팔았다. 그 돈으로 콩국수 한 그릇을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날의 콩 국수는 얼마나 맛있든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내 텅빈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6년 뒤 큰 오빠가 죽었다. 내 나이 29살 이였다. 난 그 때 한참 힘들어 엄마까지 돌봐줄 여력이 없었다.그리고 내 나이 31살이 되던 해의 엄마의 73번째 생일날 시골에 갈려고 하다가 가지 않았다. 그때 시아버지가 전화하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난 토라져서 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는 '우리 ㅎㄱ이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9월 보름달이 휘엉청한 밤에 그 달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나는 엄마를 따라 죽지 않았다.
나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 6년전 큰 수술을 하고 반짝이는 반지를 샀다. 그리고 또 며칠 전에도 필라테스를 하고 오다가 또 샀다. 아무리 반지를 사다 껴도 내 손은 엄마의 반지를 꼈을 때 만큼 예쁘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