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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Feb 15. 2021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

비밀처럼 시간이 흘러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

상처들이 아물어가면

설레이던 너는

설레이던 너는

한 편의 시가 되고-

숙모는 김태원 씨가 천재라고 했었다.


10년 전, 오디션 프로그램 붐이 막 일어났을 때 즈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었다. 운이 좋게도 예선을 통과하고, 방송에 나올 기회를 얻은 나는 부활의 '비밀'이라는 곡을 선곡했다. 며칠간 노래를 연습하고, 내게 프로그램 참가를 종용했던 숙모를 찾아가 앞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숙모는 그 곡의 가사를 듣고는 김태원 씨가 천재라고 말했다. 나는 숙모 앞에서 '그렇군요'라고 답했지만,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가는 것보다, 설레이던 너는- 의 파사지오 구간과 후렴구의 하이노트들이 거슬렸기 때문에, 사실은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최근에 이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일부러 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른 것은 아니고, 아마 하루 종일 틀어놓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추억 속으로 끌고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ㅂㅣㅁㅣㄹㅊㅓㄹㅓㅁ ㄱㅖㅈㅓㄹㅇㅣ ㅎㅡㄹㄹㅓ'가 아니라,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런 가사를 쓸 수 있다니, 김태원 씨는 대단한 사람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참 감사하게도 항상 분에 넘치는 집단에 속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빛을 내는 사람들 옆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PC방 구석자리에서 보내긴 했지만, 어떻게 굶지는 않고 사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때로는 나도 빛을 내고 싶어서 주변 사람들을 따라 해보기도 했지만, 내가 어울리는 자리로 항상 회귀했으니 아마 이렇게 살 팔자였나 보다. 오죽하면 제일 가까운 L이라는 놈은 나를 '럭키-노숙자'라고 부를 정도니, 아마 속된 말로 세상 참 대책 없이 살았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생각의 성장이 초등학교 때 멈췄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중학교 입학 이후로는 소위 건설적인 생각 자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녹여버리길 원했고, 게임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도파민은 내 시간을 지배해서, 내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내 속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 주었다. 가끔 게임이 안될 때면, 다른 자극을 찾거나, 이어폰을 양 귀에 꽂은 채 정처 없이 걷기만 했다. 물론 교육과정을 전부 던져버릴 정도로 겁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필요한 수준의 지식을 내 안에 넣는 시간을 갖긴 했으나, 그 시간의 양과 질을 따져보면, 처참한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 이후 10년간, 성장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도 이제는 김태원 씨가 대단한 사람인 것을 알았다. 시간은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를 성장시켰다. 아마 10년의 대부분을 차지할 PC방 구석자리, 이어폰을 끼고 정처 없이 터벅터벅 걷던 공간들, 친구들과 비워낸 술병들, 주변 사람들을 따라 뭐라도 읽어보던 도서관 그 자리 모두가 10년이란 시간을 짜내어서 내게 선물해줬다. 모든 시간과 경험들이 나한테는 너무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나쁜 건 나였다. 사실 지난 10년간, '비밀'을 적어도 100번은 넘게 들었을 것이다. 박완규 씨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데다가, 아무래도 추억이 담긴 곡이니. 그런데 지금까지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를 듣지 못한 것은, 시간을 녹여버리는데 힘을 쓴 과거의 나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들마저도 나를 성장시켜준 선생님이었단 것을 깨닫지 못한 매 순간의 나 때문이었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항상 나를 성장시킬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바보 같은 내가 함부로 그 시간들을 평가해버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의 나는 선생님의 존재도 깨달았거니와, 함부로 시간을 평가하던 나도 결국에는 내 선생님이 되어줄 터이니.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도 봤을 것이고, 그것을 성취하여 행복에 도취된 적도 있을 것이고, 시련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나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큰 복이다. 그 시간들은 분명 내 선생님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적어도 나보다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실, 지금도 나는 10년 전 숙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비밀처럼 계절이 흘러'를 듣게 되었으니 괜찮다. 비밀처럼 계절이 흐른다. 비밀처럼 시간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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