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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Feb 25. 2021

가벼운 글

나는 올해 인생의 1/3을 바꿨다

2021년은 아직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올해 들어 나는 아주 큰 변화를 겪었다. 9살 무렵 사촌 형네 집에서 접했던 스타크래프트-브루드워로부터 시작한 20여 년의 게임 인생을 끊어버린 것이다. 혹자는 '그깟 게임 그만두는 게 대수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나에게 아주 큰 사건이다. 아마 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중학교 3학년 즈음부터는 잠을 잤던 시간보다 게임을 했던 시간이 더 많았을 테니까, 나에게 게임을 끊는 것은 인생의 1/3을 바꾸는 정도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들 새해가 되면 여러 다짐들을 한다. '올해는 금연해야지', '올해는 운동을 열심히 해야지', '올해는 연인을 만들어야지' 따위의. 물론 다짐들은 그저 다짐에 불과하게 되고, 거의 모두는 2020년과 2021년을 구분하지 못한 채, 월화수목금토일이 계속되는 삶을 산다. 가끔은 다짐을 현실로 바꿔내는 돌연변이들도 있긴 하지만, 그 돌연변이들 조차 대부분은 정상 범주의 인간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돌연변이였어'라는 말이 나와야 맞을 것 같지만, 2021년을 맞는 2020년 말의 나를 기억해보면, 새로운 다짐을 하기는커녕 게임 등수 하나 올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인간의 축에 낄 수 있었을지나 의문이 간다. 그런 면에서는 돌연변이라고 해야 하나. 뭐 여하튼, 2021년 1월 1일은 그저 나에게 금토일의 연휴를 선사한 빨간 금요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전날 밤 친구네 자취방에서 싸구려 와인을 잔뜩 들이부었던 것 같다. 새해 첫날 낮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게임을 켰고.  


아주 큰 사건이 있긴 했다. 가까운 사람은 알고 있지만, 사실 1월 초에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었다. 잠깐 휘청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자로 누워서 정신을 잃었었다. 회사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하마터면 실신남이 될 뻔했다) 30대 초반의 지병이라곤 앓아본 적이 없는 건장한(?) 남성이 갑자기 실신하는 일은 흔치 않으니, 내게는 나름대로 큰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이 일이 게임을 끊는 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진 않은 것 같다. 당장 다음 날 휴가를 쓰고 여느 쉬는 날과 마찬가지로 그냥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했으니. 그 어지러운 와중에도 컴퓨터를 킬 생각을 하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열정이 대단하긴 했다.


최근, 나는 꽤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 새벽에는 헬스장에 들러 쇠봉과의 사투를 벌인다. 새벽까지 게임하느라 입사 초창기부터 밥먹듯이 해온 지각은 이제 나와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골프 연습장에 들러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내 몸뚱이를 원망한다. 집에 도착해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튜브를 보며 보내지만, 가끔은 책도 뒤적인다. 그리고는 12시 즈음 불을 끄고 잠에 든다. 집에 도착하면 옷도 갈아입기 전에 컴퓨터를 켜던 지난날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지난 1년 반 가량 군말 없이 초과근무를 하던 내 컴퓨터는 장기휴가를 떠났다.


대체 나는 게임을 왜 끊었을까? 그냥 2021년 1월 둘째 주에 갑자기 게임이 질려버린 걸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게임을 끊었다고 말하면 '이제야 정신 차렸구나'라든지, '말도 안 돼', 심지어는 '곧 죽는 거 아니냐' 따위의 반응을 내놓는다. 꽤나 거창한 다짐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변화 등이 있었다면 정신을 차려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게임만 끊었지 별 다른 생각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곧 죽는 게 아니냐고 하기엔 검사 후 별 문제가 없다고 병원에서 말해주었으니 그 가능성도 희박한 것 같다. 검사하지 않은 부분에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그럼 대체 나는 게임을 끊었을까? 지난 며칠간 꽤나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쉽사리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지금껏 살면서 어떤 문제든지 깊이 고민하면 나 자신은 납득할 법한 대답을 내놓았었는데, 이번엔 그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심지어는 그게 오롯이 나의 문제인데도. 나는 나를 꽤 잘 아는 사람이라고(메타-인지가 뛰어나다고) 어느 정도는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이 정도 수준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나 보다.


뭐가 되었든 전보단 나은 것 같으니 받아들여- 하고 넘어가기엔 내 성질이 허락하질 않는다. 아마 이 성질 때문에 여러 기회들을 날려먹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게 나니까 어쩔 수 없다. 만약 타협을 한다면, 변화를 그저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인간 행태의 변화는 사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답이라도 해야겠다. 상투적인 말이라도 적자면, 사람은 어찌 되었든 누구나 내적으로/사회적으로 복잡한 환경에 처해있으니 인간 행태의 변화를 특정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책임하다고 말할 순 있겠다. 아팠던 것도 영향을 주었을 테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젠 그만하자'라는 심리적 기제도 조금은 작동했을지 모르겠다. 한마디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내 내면의, 그리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영향을 끼쳐서 내 인생을 바꿔놓았나 보다.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 타협해야겠다.


결론이 조금은 찝찝하지만, 나는 모종의 이유로 내 인생의 1/3을 바꿨다. 당장 내일 다시 게임을 켤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인생의 기록을 경신 중이다. 지금의 나로는 옛날처럼 게임에 빠지는 것이 상상되지 않는다. 변화가 즐겁다. 나에게 문제를 내고선 답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나 즐거운 경험도 주고 있다. 등가교환이라기엔 내가 너무 이득 보는 장사 같아 기분이 좋다. 어찌 보면 이 문제를 푸는 일조차 후에는 내게 큰 효용을 줄 테니 교환이 아니라 나만 이득보고 있다고 해야겠다. 조만간 타협을 깨고 내 멋대로 계약 조건을 수정해야겠다. 2021년 시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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