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nogoodnw
Jan 18. 2023
뉴진스의 노래는 졸림과 몽환적임의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나이를 좀 먹은 탓인지, 요즘 여자 아이돌 노래를 많이 듣는다. 유튜브 뮤직은 대단해서, 임의의 여 아이돌 노래를 하나 재생하면 그 뒤로는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여자 아이돌 노래 리스트를 생성하고 재생해 준다. 아이브, 뉴진스, 아이들, 에스파 가릴 것 없이 대표곡들이 재생된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애지간한 노래는 들으면 제목과 그룹명까지 바로 떠오른다.
노래를 듣다 보면, 각 그룹별로 노래에 특징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가령 르세라핌이란 그룹의 노래는 모든 노래가 단순한 주 멜로디의 변주들로 이루어져 있다. 맨 처음 주제가 제시된 후에, 그 주제가 조금씩 변주되고 쌓이면서 곡이 이뤄진다. 바흐의 푸가 같다고 해야 하나. 그룹별로 꽤 상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그 구분 작업의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많은 그룹 중에서도 뉴진스라는 그룹의 노래는 정말 유별나다. 노래들이 하나같이 흐물흐물하다. 이 그룹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아주 강렬한 신선함에 매료되었다가 졸림과 몽환적임 사이의 미묘한 지점에서 고개를 흔드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흐물흐물한 노래가 듣는 나를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대체 왜 이 그룹의 노래가 유독 흐물흐물한지(사실 이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인식일지 모른다) 궁금해져서, 요 며칠간 주의 깊게 들으며 나름대로 몇몇 요소들을 찾아냈다.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들리는 대로 적었으니 그 정합성이 대단치는 않겠지만, 내게는 아주 즐거운 작업이었기에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해 본다.
첫 번째, 뉴진스의 노래는 베이스 음을 극도로 제한한다는 특징이 있다. 베이스음은 저역대에서 노래를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베이스 음역의 강조는 노래를 지상에 뿌리내리게 하여 웅장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베토벤 소나타 제8번 <비창> 1악장은 아주 좋은 예시가 된다. 만약 저 곡들이 베이스 없이 윗 성부만을 연주했다면, 아무리 주제부가 훌륭했다 하더라도 멕아리없이 들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뉴진스의 노래들은 역으로 베이스 음역의 음량을 극도로 줄여 노래가 정처 없이 부유하도록 만든다.
두 번째, 특정 음역 이상의 고음역 보컬이 없으며, 인위적으로 끝음 처리를 길게 하여 여운을 남긴다는 특징이 있다. 곡만 보았을 때, 뉴진스와 가장 비교되는 여자 아이돌 그룹이 에스파다. 에스파의 노래는 위에서 언급한 저음역의 소리가 끊임없이 강조되며, 그와 함께 찢어지는 듯한 톤을 가진 보컬(어떤 멤버인지는 모르겠다)이 D5 이상의 음을 진성으로 내어 웅장한 분위기를 끝까지 고조시킨다. 뉴진스의 노래는 정반대다. 여성에겐 중음역에 해당하는 음역대가 노래의 최고 음역대이며, 그 마저도 힘을 뺀 목소리로 음들을 처리한다. 또한, 매 진행마다 끝음을 아주 길게 빼내어 페이드아웃 시키는데, 이 역시 그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크게 한몫한다. 이와 같이 힘을 쭉 뺀 보컬은 뉴진스의 노래가 다른 여자 아이돌 노래와 차별점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장조 위에서 9도 화음 구성음들을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9도 화음은 정말 매력적인 화음이다. 그 구성으로 인해 불협화음도, 완전화음도 들을 수 있는 화음이다. 불협화음과 완전화음이 함께 들리기에 청자의 인지 내부에서는 진동이 발생하고, 그 진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주기도, 모순적인 분위기를 주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에스파 역시 9도 화음을 가끔 사용하는데, 단조 위의 9도 사용은 가사와 곁들여져 듣는 이로 하여금 가수들과 함께 투쟁하는 듯한 분위기를 제공한다. 스파이 영화에서 급박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음악에도 단조 진행과 동시에 9도 화음이 빈번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 화음의 힘을 알 수 있다. 반면 뉴진스는 장조 진행에서 9도 화음을 사용한다. 장조 진행 중의 9도 화음은 완전화음을 조금 더 강조하는 동시에 불협화음을 살짝 들리게 하여 완전하지만은 않은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물의 유희>를 들어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9도 아르페지오는 이 곡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그 미묘한 뒤틀림은 청자를 긴장하게 함과 동시에 현실에 붙인 발을 떼고 음악의 물속으로 스르르 뛰어들게 만든다. 뉴진스의 노래도 이와 마찬가지 수법을 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특징은 뉴진스의 노래를 오묘하게 만든다. 아주 즐거운 오묘함이다. '쿵짝쿵짝 위에 베이스를 얹고 자극적인 사비를 넣어 3분의 쾌락을 제공한다'는 공식을 깨부수는 듯하여 듣는 것이 즐겁다. 요즘 여자 아이돌 곡들은 나름의 철학과 패턴을 지닌 것을 보니 전보다 수준이 올라간 것 같다. 뭐, 내가 주의 깊게 아이돌 노래를 들어본 것이 처음이라 이리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언제까지고 여자 아이돌 노래를 이리 자주 듣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뉴진스의 노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내 뇌리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