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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Jan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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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존재와 역의 실존 - 사랑

까뮈의 대표작 4권(이방인-시지프신화, 페스트-반항하는 인간)을 모두 읽었다. 다루고 있는 생각 자체가 내 기준에선 너무 고차원적인지라 머릿속에 잘 펼쳐 넣기 어려웠는데, 심지어 철학 에세이에서는 전혀 관심도 없던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담고 있어 한 문장 한 문장 읽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나마 ‘시지프 신화’는 길지 않아 꾸역꾸역 읽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는데, ‘반항하는 인간’은 도저히 페이지가 넘어가질 않았다. ‘잠을 설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책의 중간 즈음인 러시아의 여러 혁명들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었을게다.

까뮈가 실존주의 소설가 혹은 철학가인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대표작 4권 읽고  복잡한 천재에 대해 뭘 알겠냐만은, 본인이 실존주의자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하니, 굳이 그런 말을 그에게 붙여야 하나, 싶다가도, 어쨌건 인간의 선택 – 이 경우에는 인간 이성에 뒤따른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절도 있는 반항 선택이 될 것 – 을 중히 여겼으니, 실존주의자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본능적인 인간의 분류, 개념화의 편의를 위한 구분이니 이 실천적 이성에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까뮈는 그저 까뮈일 뿐이다. 외려 이 의미 없는 구분의 극단으로 몰고 간 이성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볼지 모르겠다.

굳이 분류하자면, 내게 까뮈는 인도주의자 그 자체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류에의 사랑을 말한 사람이다.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c'est le suicide(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는 이 충만한 사랑의 인간을 허무주의자로 오인토록 하지만, 그의 모든 말들은 결국 찬란한 인간다움의 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는 인간적이기 위하여 인간적인 가치를 내려놓고, 부조리의 양극단 모두에서 줄타기를 하며 세상으로 굳세게 나아가기를 우리에게 말한다.

까뮈의 말은 일견 인간에게 과한 책무를 지우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역사 이래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고 타락하여 옳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럼에도 그는 우리에게 극기에 가까운 삶을 요구한다. 외려 까뮈 자신이 비판한 신성화를 바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인간을 사랑한 자는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절도 있는 인간다움으로 부조리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사랑은 신성한 것인가 보다. 자살을 해결해 보니 그 뒤에는 삶의 어려움이 남았다.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면, 그 책무가 과연 과한 것일지.

어찌 되었든, 까뮈의 말로 우리에겐 사랑이 가득하다. 본인이 직접 말하던, 가장 무의미한 죽음인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그의 삶을 결국 부조리로 매조지었고, 그의 철학미완성으로 남겼으나 우리는 여전히 대표작만으로도 그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다. 그의 말들은 ‘반대의 존재에 따른 역의 실존’을 남겨놓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사랑의 이름으로 나아가보자. 부조리가, 그리고 그에 따른 반항이, 우리가 사는 이유를 만들어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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