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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Jan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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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관하여 - <논고> 7절에 대한 주저리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저 유명한 <논고>의 마지막 구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범주를 나누는 일을 <논고>의 주된 이야기로 삼았고, 그것의 귀결로 저 문장을 내놓았다. 감히 내가 그분의 말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아주 많이 부끄러운 일일 터이나, <논고>라는 책이 내게 아주 큰 감동을 주었고, 더군다나 ‘침묵’이라는 일상 언어에 한해서는 그 창피함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조심스레 몇 자 적어본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침묵은 ‘아무 말도 없이 잠잠히 있는 것 혹은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일정 수준의 에너지를 요하는 행위이다. 사실적 대상이든, 형이상학적 대상이든 한 대상을 인지하고, 여러 감각기관을 통해 그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여러 사람 간에 합의된 규칙에 의거하여 1차적 정보, 혹은 사람 내부에서 발전시킨 2차, 3차 정보를 발화하는 행위이다. 그 대상과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에너지의 소모를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하며, 때때로 우리는 이를 위해 내가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사용하곤 한다. 그러니까 이의 반대인 침묵은 에너지의 개념에서는 소극적 보존 행위라 할 수 있다.

다만, 인간의 특성에서 침묵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정녕 소극적 범주의 행위인지는 다소 의문이 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참이라 한다면, ‘인간은 서로 지속적인 소통을 필요로 한다.’ 역시 참인 명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의 수단은 물론 다양하겠으나, 그중 제일은 언어로 하는 ‘말’ 임은 자명하다(최근에 가장 자주 본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다). 결국 인간은 ‘말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행해야 하는 동물이며, 이러한 관점에 따를 때, 침묵은 위에서 언급한 소극적 범주보다는 적극적 범주가 더 어울리는 행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침묵의 우월한 가치를 찬양하는 격언들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비단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전기 철학에서 주장한 것은 ‘세계 그 자체에 철썩 붙어있는 아주 정적인 언어’에 가까우나, 분명 그는 실천적 사상을 주창한 사람이었고, 후기 철학에 갈수록 특히나 기호 자체를 넘어서는 비언어적 속성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따라서, 위의 침묵에 대해서 후자의 ‘적극적 침묵’을 적용하는 것이 그의 철학과 아주 동떨어져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그가 <논고>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 말하는 것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이며, 우리는 완벽한 논리적 언어의 귀결이 인간 실천에 이르게 되는, 아름다움의 정수를 지닌 그의 철학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결국 침묵이, 행동이, 그리고 그 위에 그저 존재하는 세계가 우리를 이끌 것이니. 다시 한번,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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